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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의 정상화, 정상의 비정상화]

2014년 2월 28일 경향신문에서 비정상의 정상화, 정상의 비정상화라는 컬럼을 보았습니다. 옮깁니다. 너무 좋으니까.

국민행복 시대에 행복하지 않은 나는 국민인가, 난민인가? 비정상의 정상화로 국민을 다그치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이 60%가 넘는 사회에서 정권퇴진에 서명한 나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나에겐 김시습처럼 전국을 유랑하며 노래할 시가 없으니 대궐을 향해 몸도 틀지 않았다는 이맹전처럼 산에 들어 눈뜬장님으로 살아볼까? 정상이 비정상으로 판명나는 그날까지!

산속 깊이 들어가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중에 사람이 가장 무섭다. 그래서인가? 등산로에서 만난 사람들은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자는 약속이다. 그 뜻 모르고 불쑥 제 길만 가는 이는 산에 오를 자격이 없는 이방인이거나 비정상이다.

불협화음도 화음이지만 안 어울리면 고통을 준다. 고통은 악이지만 비정상인 것은 아니다. 고통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니 제 몫의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만큼 정상적이다. 이처럼 고통이 정상이라고 해서 선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은 선과 악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악의 저편에서 정상과 비정상이 불협화음처럼 화음과 어울리는 사회가 정상인 것이다.

문명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면서 탄생했다. ‘우리’가 정상의 상징적 기호라면 우리 밖의 타자인 너희는 비정상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비정상성을 타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근원적 속성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분리의 근거는 분류당한 대상의 선험적 속성이 아니라 분리하는 주체가 소속된 집단의 결속 의식일 뿐이다. 판단 주체에게 익숙하고 친숙해 자연스러우면 정상인 반면, 낯설고 이질적이어서 부자연스러우면 비정상이다. 그런데 익숙함이나 친숙함이라는 기준 자체의 의미가 모호하다보니 결국 ‘우리’의 숫자가 판단의 결정적 근거로 작동한다. 사회학을 연 에밀 뒤르켐의 용어를 빌리면 ‘집합의식’과 ‘집합감정’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결정적 열쇠인 것이다.

비정상이란 판정은 비난과 회피를 넘어 처벌과 감금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비정상 담론을 부추기는 권력자들은 비정상(병폐와 부조리)으로부터 정상(기본, 원칙)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그들의 속셈은 ‘우리 밖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의 타자’가 집합의식을 훼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소수의 비정상을 희생시켜 다수의 정상을 집합감정으로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규율된 약자는 정상의 성에 진입하기 위해 매 순간 긴장해야 한다. 둘을 나누는 잣대가 부실하니 언제 어느 쪽으로 기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곧바로 비정상으로 축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곧 비상 상황인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강자의 편을 들게 되는 이유다.

비정상 없이는 정상도 없다. 그래서 뒤르켐은 범죄도 정상이라고 말한다. 불법적 범죄는 법의 폭력과 독단을 교정할 뿐만 아니라 나중엔 합법이 될 수도 있다. 그가 비정상의 축출이 아니라 공존을 꿈꾸는 까닭이다. 이처럼 함께할 수밖에 없는 비정상을 전멸시키겠다는 열망, 다시 말해 모두가 동일한 집합감정을 갖게 하려는 갈망은 전체주의자들의 욕망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욕망에 맞서 비정상과 정상의 이분법이 없는 순수한 자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분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출구가 없다면 기준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집합의식의 마취에서 깨어나 자기의식을 되찾는 길이다. 자기의식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런 자기의식을 기준으로 세우면 노동자 의식을 가진 노동자는 정상이고, 자본가 의식을 가진 노동자는 비정상이다. 남자의식으로 무장한 여자가 비정상이듯, 유산자 의식을 가진 무산자도 비정상이다. 그러니 경제민주화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은 비정상이다. 정상 집단에 들어가려고 비정상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이 혐오해야 할 것은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 주는 고통이다.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과 싸워야 할 때다.

<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2014년 3월 3일 경향신문에 [김호기의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11) 진보주의, 사상의 과잉과 정치의 빈곤: 조희연과 김상조에서도 조희연 교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희연 교수는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책을 쓰신 분입니다. 김호기 교수 기고 일부를 옮깁니다.

...한국 진보주의의 풍경을 나는 ‘사상의 과잉’이라고 묘사하고 싶다. 여기서 과잉이란 부정적 뉘앙스를 갖는다기보다는 차고 넘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사상이 이렇게 차고 넘쳤던 것에 반해 진보 정치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모습을 보여 왔다.

...조희연의 대표작은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2004)이다.

우리 사회 사회운동이 ‘개발독재적 예외국가’의 비정상성에 대한 투쟁에서 출발했다면, 이제 자본주의적 정상성을 특징짓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 주력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정상성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정상성들인 노동 유연화, 비정규직 증가, 성 차별, 환경 파괴, 장애인 및 동성애자 차별 등에 저항하는 급진 민주주의 기획을 조희연은 진보적 사회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한다.

...진보의 핵심을 이루는 가치는 시장의 적절한 제어, 사회적 약자의 보호, 개인적 자율과 공동체적 연대의 생산적 결합에 있다. 앤서니 기든스가 강조하듯, 정책의 혁신만이 진보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극복, 복지국가 구축의 진보정책에 동의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작은 차이를 넘어선 큰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