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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대형참사, 원인은 ‘돈’…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펴낸 건축가 함인선]
안전은 돈입니다. 아무리 안전의식을 강조해도 기본적으로는 돈을 써야 안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돈을 잘 써야 합니다.
싼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비지'를 좋아합니다). 최소 비용만으로는 아무리 잘해도 그렇고 그런 품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돈을 쓰지 않으면 안전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안전을 최우선 방향으로 설정하여 자원을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는 아직 안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점입니다. 안전을 위하여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 똥개 취급받기 일수입니다. 사전에 주의하자고 이야기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아직 '안전 비용'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한 돈을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어디선가 돈을 절약해야 합니다. 이것이 '낭비요소 제거'입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 겉멋을 위한 일은 하지 않는 것, 사소한 것부터 절약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그래야 안전을 위해 투자할 돈이 생깁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껴야 안전해집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마련된 돈은 효율적으로 쓰여야 합니다. 한 푼이 아쉽기 때문입니다. 안전을 이유로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전을 위해 돈을 씁시다. 돈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1) 다른 분야의 낭비를 줄여서 만든 '잉여'를 안전에 투자하는 것과 (2) 가격을 올려 추가로 안전분야에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격을 올리는 것은 사회적 합의이므로 쉽지 않습니다만...
우리 모두 솔직해집시다. 돈을 쓰지 않고 그냥 노력만 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안전해지지 않습니다. 대형 사고는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왕창 안전해지려면 돈을 써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안전과 무관한 부분에서 엄청 아껴야 합니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어떤 건축가의 신간이 소개되었습니다.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일단 기사 전문을 소개합니다.
함인선 새건축사협의회 회장(55)은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경주 마우나 리조트, 세월호 사고의 원인이 같다고 했다. 바로 ‘돈’이다.
과거 대형 설계사무소 최고경영자,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며 수백건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맡아온 그는 신간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마티)에서 수십년간 되풀이되는 참사의 원인과 한국 사회의 대응을 비판한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당국과 언론은 엄벌에 처할 책임자를 찾아내고 제도 보완에 분주하며 사회의 '안전불감증'을 자성한다. 그러나 떠들썩한 소동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사고가 또 터진다. 소동은 반복된다.
그러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고, 윤리가 아니라 비용이다. 함 회장은 공학적 의미에서의 ‘안전율’을 말한다. 건물, 다리, 비행기, 배 등 모든 구조물에는 1.5~2.0의 안전율이 있다. 이는 예상 하중의 1.5~2배의 힘이 가해져야 파괴되도록 설계됐다는 뜻이다.
마우나 리조트를 예로 들어보자. 당시 경주에는 50~80㎝의 폭설이 내렸다. 습기를 머금은 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지는 습설이었다. 국내 적설하중의 기준은 ㎡당 50㎏인데 마우나 리조트 지붕에는 그 3배인 150㎏의 하중이 가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붕괴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기준의 3배 이상으로 구조를 튼튼하게 지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1.5~2배의 공사 비용이 추가된다. 건축주가 이러한 ‘과다 설계’를 허용할까.
함 회장은 “이 비용은 지금까지 지불했어야 함에도 유예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온갖 대책이 나오지만 정작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최근 안전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제2롯데월드도 마찬가지다. 함 회장은 “건물이 200층이라도 공학적으로는 해결책이 있다. 다만 비용이 많이 든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안전 기술은 균일하다. 그러나 터키 광산의 연평균 사망자는 영국의 16배다. 터키인들의 목숨값이 영국인들보다 싸기 때문이다. 안전 문제는 이처럼 세속적·경제적이다. “한 나라 건축의 불법·부실의 정도는 그 사회가 지불할 수 있는 총 비용과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는 게 함 회장의 지적이다.
자동차, 비행기 회사는 안전율을 지킨다. 과점 시장을 형성하는 몇 군데 회사만 감시하면 되고, 그마저 문제가 생기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규모 건설사, ‘떴다방’ 등을 모두 규제할 방도는 사실상 없다. 함 회장은 “국가가 감시하고 처벌하겠다는 마인드 자체가 전근대적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그 규모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그래서 중요한 게 '사회적 컨센서스'다. 한 세기 전에는 미국도 하루 100명씩 죽는 고위험 사회였다. 그러나 1911년 뉴욕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봉제공장 화재에서 10·20대 소녀가 대부분인 146명이 사망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를 계기로 시민, 정치인, 노동단체들이 함께 공공안전위원회를 만들었고, 2001년 9·11 테러 이전까지는 이를 넘는 인명 사고가 없었다. 함 회장은 “안전에 관한 한 모든 규제는 선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지금은 ‘국민의식 개조’가 아니라 비용을 감당하는 사회적 컨센서스를 만들 때”라고 말했다.
사고 원인 분석에 있어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면서도 건축가들이 가져야 할 ‘직능의 윤리’는 강조한다. 건축가는 “인문사회학적인 요구를 공학적 물건으로 번안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함 회장은 “‘혁명을 피하려면 건축을 하라’는 말이 있다”며 “직능인으로서의 건축가뿐 아니라 건축주, 행정가 모두 건축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독서] 건축가 함인선이 쓴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을 읽었습니다. 안전에 대한 솔직한 시각이 오히려 새롭게 느껴집니다. 돈 없이는 안전해 질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일부를 옮깁니다.
(8쪽) 인재라는 뜻은 천재지변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배나 건물에 잘못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배의 평형수를 빼고 철근을 빼먹고 폭설을 보고도 멀뚱거린 사람들이 초래한 재난이라는 뜻이다. 개발의 저주도 마찬가지다. 금융시스템이야 무슨 죄인가? 뻔히 보이는 리스크도 눈감아버린 의사결정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8쪽) 비행기와 자동차 관련 사고는 점점 줄어든다. 상대적으로 해운, 건설 분야는 왜 이럴까? 한 마디로 대표적인 저급기술(low technology)이기 때문이다. 대형 여객기 제조사는 전 세계에 두어 군데, 자동차는 많아야 20군데다. 세월호 정도 만드는 조선소는 몇백 군데일 것이고 경주 리조트 정도는 동네마다 10여 군데는 있다. 통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범위다. 식품처럼 소비자가 금방 알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니 쉽게 부실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10쪽) 우리사회는 '위험사회'가 아니다. '위험을 즐기는 사회'다. 높은 리스크를 감수한 사람들의 성공담에 주목하고 정상적인 소득과 모험 없는 인생은 따분하게 그려진다. 이 저변에는 가난을 급속하게 돌파하려는 과정에서 응축된 물신주의가 있다. 물신은 어느새 생명과 재산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모셔야 하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물질적 풍요는 얻었으되 근대의 정신은 얻지 못했다.
(19쪽) 결국은 공학과 돈의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자꾸만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로 바꾸려 든다. 왜냐하면 당장 범죄의 원인을 인격화하여 윤리적 비난과 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어서 좋고,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드는 시스템 구축을 회피해 지불 유예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학이다. 공학은 돈과 안전 사이에서 평형을 잡는 학문이다. 순수 공학적으로만 본다면 사고로 죽을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비행기를 만들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비행기가 투입된다면 항공료는 몇 곱으로 뛸 것이다. 그러므로 바꿔 말하면 우리가 싼값으로 미주, 유럽을 갈 수 있는 것은 '적당'하게 사고가 나도록 설계된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관건은 이 '적당'이 무엇이냐이다. 공학적으로는 '안전율'이고 사회적으로는 '목숨값'이다. 그리고 이 '목숨값'은 보험사들의 정교한 계산에 의해 책정된다.
(21쪽)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모두들 '예고된 참사'라고 입을 맞추었다. 필객들은 서정적인 분석과 나라와 관계자를 꾸짖는 격문을 썼다. 그러나 '예고'되었는데 무엇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세월호의 안전율은 우리 사회가 이미 암묵적으로 인정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배의 안전율은 곧 운항수익의 함수이다. 그리고 운임은 좁게는 그 회사의 경영진이 정했겠지만 넓게는 동종업계의 합의였을 것이고 더 크게는 물가를 통제하는 당국과 시장이 정했을 것이다. 박하게 책정된 안전율임에도 범죄자들은 이마저도 빼먹을 것이라는 것은 경험상 '예견된 일'이다. 그리나 국가나 우리 시민 모두 '예고된 범죄'를 막지 못했다. 사회적 '예고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강력한 처벌 같은 사후약방문이나 사회적 각성, 물신주의 문화의 청산, 국가안전처 신설 등의 대증요법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님을 얘기하고자 함이다. 이 문제는 철저하게 비용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비용은 지금까지 비불했어야 함에도 유예해 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고 과연 우리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27쪽) 공학적 사고의 원인은 안전율의 부족 때문이고 안전율의 부족은 돈의 부족 때문이다. 터키에서 이번에 광산 사고로 400명 이상이 또 죽었다. 연평균 사망자는 영국의 16배다. 같은 시대에 그깟 안전 기술이 터키에 없을 리 없다. 그 기술을 구입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영국보다 목숨값이 그만큼 싸기 때문이다. 미국의 골드러시 때 사람 목숨값은 노새보다 못했다. 노새가 이민 노동자보다 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전불감증의 문제가 아니다. 안전 '공학-경제학'의 문제이다. 너무사 세속적인 이 근대의 논법을 부인하면 절대로 우리 사회의 사고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음에도 '안전불감증'이라는 병세로 판단하는 이 사회는 범죄자를 악귀에 사로잡힌 자로 보았던 중세와 어떤 측면에서 다른가? 우리에게는 사고를 최대한 억제시킬 기술이 이미 있다. 단지 이것을 구입할 비용에 대해 논의한 적도 계산한 적도 없을 뿐이다. 이 논의를 아주 세속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근대의 시작점이다.
(33쪽) 대책이라고 나온 것들도 전부 '말'이다. 처벌 감독 강화, 재발방지책 수립, 어떤 기관의 설치 등 방금 지어낸 조어들이거나 늘 듣던 레토릭이다. 진정성이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율을 올리기 위한 비용 계산만 해도 족히 몇 달은 걸릴 터인데 덜컥 나온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안전율을 올리기 위한 비용 산출과 국민 부담 증가분 계산은 언제까지 하겠다."라는 말을 하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삼가는가?
(34쪽) 우리나라 선장 중에는 석해균 선장도 있고 세월호 선장도 있다. 이러한 편차는 개인을 탁하고 벌할 때는 유효하지만 사고재발 방지를 고민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고려하면 안 되는 변수이다.
(37쪽) 규재완화가 범죄를 만든다.
(77쪽) 서구에서는 전문직의 협회에 정관이 없는 대신 윤리강령이 토대가 된다. 직능의 윤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전문가의 범죄를 찾아내고 제어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정화에 의해서 신뢰성을 지키겠다는 그들 스스로의 합의 덕분이다)... 집장사에 예속되어 불법과 부실 건축 양산에 협조하거나 방조한 건축사들도 마찬가지다. 저들의 불법, 부실이 법적,사회적으로 그리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리는 것일지라도 면책사유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설계와 감리는 건축사들이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개별 건축사들의 거부로 이루어질 문제가 아니라면 국가에 대해 면서를 반납하겠다는 집단 저항이라도 해서 근본적인 대책이 수립되도록 힘써야 옳다. 설계자가 감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식의 제도개선은 실효성도 없으려니와 더 나아가 우리 모든 건축사는 잠재적 범죄자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꼴이다.
(79쪽) 선진국의 건축가가 사회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를 말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선배들이 건축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어떠한 고난의 행군을 했는지를 읽어야 한다. 저들에게도 지금의 우리에게 닥친 것 같은 위기이 시절이 있었고 수많은 유혹의 과정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몇몇은 끝가지 타협하지 않고 건축과 건축가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지금 저들이 받는 예우와 대접은 그 투쟁의 산물이다.
1) 환자 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