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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 終
1. 성균관
2. 성균관대학교와 의과대학
3. 심산 김창숙 선생님
4. 성균관대학교에 남아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발자취
5. 기타 다양한 자료
6. References
成人材之不就 均風俗之不齊
대사성 이정보가 1747년 태학속전(=태상성전보유)을 편찬하면서 함께 만든 태학계첩에 실린 성균관의 옛 모습
18세기의 지도 '한양도성도'. 개인 소장. 성균관 일대의 물길이 잘 묘사되어 있다. 위 물길을 기준으로 서반촌과 동반촌이 표기되어 있고, 반수와 홍덕동천 위에 관기교, 사락교, 광례료, 응란교, 장경교 등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그중 장경교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세워진 가장 큰 다리이다.
율전동 의과대학 의학관 기념식수. 1999. 3. 5. 서정돈
율전동 의과대학 의학관 북문 앞 금속 조각품. 작가: 문신 -
청담동 길가에 같은 건물이 있어 놀랐습니다.
정밀기선표석. 왜 이게 여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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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mini의 답변: 국토지리정보원의 전신인 국립지리원은 1980년대 초반, 전국에서 평탄하고 시야가 확보되면서도 관리가 용이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 결과 당시 조성 중이던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부지 일대가 선정되었습니다. 기선 측량을 위해서는 수 킬로미터(km) 구간이 장애물 없이 평탄하게 탁 트여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수원 율전동의 성대 캠퍼스 부지는 이러한 조건을 완벽히 충족했습니다. 대학 캠퍼스 내부에 표석을 설치하면 민간인의 훼손 우려가 적고,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관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2026-7] 삼성서울병원 한가족 의료봉사회가 스리랑카 의료취약지에서 제25차 해외의료봉사를 하였고 많은 의대생들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성균관대학교 1대 총장은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님 (1879-1662)이십니다. KBS 인물 현대사
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꼭 보시기 바랍니다. 경상북도 서남쪽 성주에서 태어나 을사조약(2005) 후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의열단을 이끌었고, 1927년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내는 등 김구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 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는 등 가열찬 삶을 사셨습니다. 경술국치(2010) 전 고향에 명성학교를 세웠고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1대 총장을 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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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인물 현대사 (2004) - YouTube 설명: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철두철미한 항일지사로 흔히 단재 신채호와 백범 김구,그리고 심산 김창숙을 꼽는다. 그러나 심산은 단재나 백범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땅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운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 사월리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 영남 유림의 후손으로 태어나 1962년 여든 넷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심산 김창숙.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다. 일본의 식민통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법을 무시했고, 항소도 변호사도 거부했다.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민족통일운동과 반독재운동을 거치면서 이승만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에 꼿꼿이 맞섰고 이로 인해 심한 고초를 겪었다. 두 아들마저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만년에 지독한 가난으로 병원비조차 없이 서울 변두리 허름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 1962년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살았고 이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걸었던 심산 김창숙. 그의 삶을 통해 해방전후사 속의 민족정신 그리고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실천하는 지성으로서의 마지막 선비의 모습을 만나 본다.
반포근린공원에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관을 세운다는 2019년 한겨레신문 기사를 옮깁니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대쪽같았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1919년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 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만 들어있고 유림 대표가 없자, 유림 130여명을 모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대표를 보내는 1차 유림단 사건을 주도했다. 단재 신채호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에 새로운 독립기지와 군사학교를 지으려고 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혀 1927년 투옥됐다. 1934년 출옥했으나 다시 갇혀 해방을 감옥에서 맞았다. 그의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그의 투쟁은 계속됐다. 신탁통치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 투쟁을 벌였고, 1952년 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을 발표한 뒤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 부산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1946년 9월 성균관대를 설립해 초대 총장이 됐지만 반독재 투쟁을 벌인 일 때문에 물러나야 했다. 그는 여든이 넘어서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을 벌이고, 효창공원의 김구 무덤을 먼 곳으로 옮기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시도를 온 몸으로 막아냈다. 1962년 83살로 숨질 때 그에겐 집 한 칸이 없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관 개관을 알리는 기사 (아시아 경제 2011)
1919년 독립선언서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파리장서를 만들어 유림의 서명을 받아 김규식에게 보내셨습니다 (1차 유림단 사건).
1926년 임시정부요인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모금운동을 하였고 (2차 유림단 사건) 무기를 구입하여 나석주 의거를 이끌었습니다.
1927년 상해 영국병원에서 일본군에 잡혀 대구에서 고문을 받아 걷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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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성균관을 복원하고 후에 성균관대학교 1대 총장이 되셨습니다. 사립대학으로서 처음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1956년 1월 이승만에 대항하다가 유도회 사건으로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셨습니다.
이승만에 맞섰고 1952년 6월 21일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는 국제구락부 사건에서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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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KBS 인물현대사 방송 당시 상주의 김창숙 선생님 집은 88세 며느님이 지키고 계셨습니다. 지금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4. 성균관대학교에 남아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발자취
성균관대학교 여러 곳에 그분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1)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님의 책 '조선의 대학로' - 중앙일보 기사 2026-2-20
© 일원내시경교실 바른내시경연구소 이준행. EndoTODAY Endoscopy Learning Center. Jun Haeng Lee (since 1999-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