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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 - 終
[2014-3-8] 한길사에서 나온 새 책에 대한 서평을 옮깁니다. 객관적인 연구, 수치화될 수 있는 것만 연구하는 경향에 대한 경고입니다. 의학에서도 중요한 것은 수치화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어떻게 수치화하겠습니까? Well-being, well-dying을 어떻게 수치화하겠습니까?
이 책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혁명이 가져온 양적(量的) 연구 방법이 인문학 분야에서도 진전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양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의미' '목적' '동기' 등 다양한 요소의 해명을 위해서는 '질적(質的) 연구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질적 연구가 현상학의 반성 능력, 비판 정신과 결합할 때야말로 단순한 연구 기술자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이론가가 될 수 있으며, 사회학·정치학·역사학·법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2014-3-8.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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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13. Update] 슈퍼스타는 천재거나 사기꾼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한 주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아주 특출한 결과를 냈다면 그는 천재거나 사기꾼입니다. 일본의 한 젊은 연구자가 슈퍼스타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사이에 사기꾼으로 추락하였습니다. 천재들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천재입니다. DNA 구조를 밝힌 사람들도 천재입니다. 그러나 사기꾼으로 판정난 슈퍼스타들이 더 많습니다.
[2014-3-13. 경향신문] 일 만능세포 연구팀장, 이번엔 박사논문 표절 의혹… “미 국립보건원 사이트와 구두점까지 유사”
‘만능세포’로 일컬어지는 자극야기다능성획득(STAP) 세포 개발을 이끈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오보카타 하루코(小保方晴子·30·사진) 연구주임의 박사논문이 표절 의혹에 휩싸였다.
세포 관련 논문 데이터의 신뢰성 논란에 이어 연구자의 윤리문제까지 불거지면서 과학계에서는 ‘일본판 황우석 사태’를 예견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오보카타 주임이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와세다대학에 제출한 영어 논문의 앞부분이 미국 국립보건원(NIH) 웹사이트 내용과 거의 같다고 12일 보도했다.
[2014-12-26. DDW에서 발표된 내시경 초록의 운명]
DDW에서 발표된 내시경 초록의 운명(The fate and reliability of endoscopy research presented at Digestive Disease Week)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특별기고를 소개합니다 (Gastrointest Endosc 2014).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full manuscript로 출판될 때 데이타가 바뀐 경우가 65%, 결론이 바뀐 경우가 22%나 된다고 합니다. Full publication 된 후에 데이타나 결론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DDW의 초록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미를 가지고 살펴보되 쉽게 믿으면 안됩니다. 결론을 옮깁니다. 주의하라는 경고였습니다.
In summary, although DDW provides an unparalleled opportunity for investigators to share research findings, attendees should refrain from altering their clinical management based on the abstracts presented. Furthermore, although “Best of DDW” review articles may better disseminate some of the more interesting findings presented at this prestigious meeting, the publication of such articles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an endorsement of the results or conclusions of the cited abstracts.
[2015-8-20. 경향신문.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학술용어의 운명
요즘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읽고 있습니다. 우연히 조간신문에서 학술용어의 운명이라는 황현산의 글을 보았는데, 외래어에 대한 입장이 이태준과는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상세한 것은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황현산의 글 일부를 옮깁니다. 저는 밑줄 친 부분이 좋았습니다.
원음을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그 말에 대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도 위험하지만, 모든 학술용어를 이미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로 통일함으로써 범세계적 학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 이런 생각이 실현된다면 우리말 전체가 학문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모든 지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간단히 말하자.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번역과정을 거칠 때의 논리적 정확성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낭비를 용납하지 않은 그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교수로 살다보니 영어로 글을 쓰라는 강한 압력을 받습니다. 영어로 쓰지 않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금방 짤립니다. 그런데 늘 어렵습니다. 황현산 선생님께서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고 쓰신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영어로 쓴 저의 논문, editorial, 편지 등에서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의 절반밖에 못했습니다. 다 말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저의 짧은 영어가 문제입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다른 것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방법은 둘 중 하나... (1) 영어 공부를 더 한다 혹은 (2) 우리말로 쓴다. 저는 당연히 후자를 택합니다. EndoTODAY를 영어로 바꾸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금방 포기했습니다. 도무지 제 생각을 영어로 쓸 수 없었습니다. 미묘한 느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말이 좋습니다.
일년에 SCI 논문 몇 개를 생산하는가로 학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입니다. 서구의 SCI 논문에 글을 싣기 위해서는 주제 선정부터 서양 학자들의 입맛에 맞아야 합니다.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한, 우리의 방법론에 따른, 우리의 연구를 하면 SCI 저널에 출판하기 어렵습니다. 저널에 내지 못하더라도, impact factor가 낮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저는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한 우리의 연구를 우리의 방법으로 하고 싶습니다.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기획 기사를 읽으며 '중심부 세계의 지식을 소개하는 소매상'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기획 - 7대 폐습 이젠 결별하자] 학문, 미국 편식·서구 추종…우리의 ‘머리’는 과연 독립했나
학계의 서구 추종을 부추기고 종속성을 견고화하는 데에는 외국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 가중치를 주는 국내 학계의 평가 시스템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강정인 교수는 “외국 학술지에 투고하려면 그들의 유행에 맞춰야 한다”고 단언했다.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절실한 주제를 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 같은 민주주의 신생국에서 정의는 과거사 청산 문제와 반드시 연결된다”며 “그러나 롤스나 샌델의 정의론에 과거사 청산 문제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학자적 양심과 주체성을 따라 서구 종속성을 탈피하려는 이들도 있다.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사회교육)는 최근 펴낸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천년의상상)이 “주변부 지역의 서양사 연구자라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번민의 산물”이라고 토로하며 “중심부 세계의 지식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소매상 신세로 전락하지 않겠다고 나름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러본 것”이라고 말했다.
[2015-11-8. 한겨레] 서울대병원 논문조작 논란, 또 하나의 ‘하얀 거탑’인가
이 재판을 둘러싼 서울대병원과 의대 내 기류는 냉랭하다. 서울대 의대 한 관계자는 “임홍국 선생의 대학교수 임용을 (제보자가) 반대했는데 위에서 이를 밀어붙이니까 (이에 반발해 논문을 제보하면서) 이 사건이 터진 건 맞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들 선후배 사제지간이다. 선생님을 클레임(비방)하는 건데 되겠나. ‘내부적으로 해결해라, 밖으로 들고 갈 일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제보자가) ‘도저히 해결이 안 난다’고 하더라. 결국 못 참고 들고 간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 진실위에 이 논문을 제보한 이는 지난 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판결 내용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해당 논문은 사망 여부가 불확실한 환자를 모두 살아 있는 것처럼 처리해 생존율을 높이려 한 악의적인 논문이다. 학계에서도 논란이 돼 다들 아는 내용인데 왜 그런 판결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2015-11-24. 중앙일보] 노벨상을 받으려면-2 연구소 벤치마킹
우리나라 대학과 출연기관들의 잡화점식 운영 방식은 신임 교수가 성장하는 데도 큰 장애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유망한 젊은 과학자를 뽑아놓고는 실험실 공간만 덩그러니 주고 기껏해야 1~2억 원 정도의 시작 예산을 준다. 학부는 잡화점처럼 수많은 전공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신임 교수와의 연계성이 적으니 이 젊은이는 자기 실험실을 제대로 차려보려고 3년 이상을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에너지를 소진하며 창의력과 경쟁력을 상실해간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출중한 인물을 데려와 범인(凡人)으로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게 일어난다.
[2015-12-10.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소식 66호]
제가 소속된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이 'THE 세계대학평가' 의학분야 세계 88등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학장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이경수 학장은 "어떤 대학에서는 교수들에게 논문을 강요하기 때문에 교수들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하는 측면이 있다"며 "이렇게 교수를 압박하면 결국 전공의에게로 전가되는데 누가 수련지원을 하겠냐"고 지적했다. 우리 의대의 경우 압박이 아닌 교수들의 자율적 논문 투고가 이번 같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것이 학장의 입장이다.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논문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교수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둘러보면 '아랫 사람들에게 논문쓰라고 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교수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경수 학장님의 말씀은 '아랫사람 시키지 말고 직접 쓰라'는 의미입니다. 논문 때문에 전공의에게 일을 시키면 학장님께 혼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하고 논문쓰겠다고 찾아오는 전공의에게만 일을 시켜야 하는 시대가 되가고 있습니다. 조금 슬퍼집니다.
'1년에 논문 하나는 직접 쓰자'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2015-12-25] 교신저자의 오류를 발견하였습니다.
[2015-12-30.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40) 시리즈를 마치며
지난 1년 동안 연세대학교 김호기 교수와 서울대학교 박태균 교수가 경향신문에 연재한 '논쟁으로 읽는 70년'이 끝났습니다. 다양한 이슈에 대하여 되돌아 볼 기회였는데 벌써 끝나다니 퍽 아쉽습니다. '시리즈를 마치며'라는 글에서 김호기 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학술과 담론 논쟁의 절정기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였다. 산업화의 목표, 민주화의 방향, 우리 사회에 강제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등에 대해 지식인들은 활기차게 논쟁을 벌였다. 그만큼 당시 한국사회와 지식사회는 살아 있었다. 어떤 논쟁이든 새로운 문제제기에 대한 도전과 사회발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이러한 논쟁의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이 강화됨에 따라 사회 전체가 활기를 잃어 왔고, 불투명한 미래와 모호한 전망이라는 지적 비관주의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지식사회를 짓누르고 있다는 게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논쟁이 시들해진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다. 대학의 세계화가 강화되면서 적지 않은 논문들이 영어 등으로 쓰여 독자가 줄어들었고, 지식사회의 전문성이 증가해 시민사회와의 소통이 약화됐다는 게 또 다른 요인들이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다함께 발전하는 지식사회는 없어지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나간 논문이 몇 개면 만사 끝인 상황에서 누가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문제를 고민하겠습니까? 영어 논문은 '양날의 칼'입니다. 공정한 시각에서 우리 학문의 오류를 바로잡는 순기능도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서양 편집자들에게 필요한 주제를 연구하게 된다는 역기능도 있습니다. 게다가 영어 논문은 화두가 되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Inner circle 몇 명만 읽는 논문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겠습니까? 김호기 교수께서 영어로 씌인 논문은 논쟁으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 논문을 씁시다. 영어 논문을 쓰되 우리말 논문도 함께 씁시다.
교수님, 잘 지내시죠? 이제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긴 XXX입니다. 오늘 EndoTODAY 잘 보았습니다.
교수님 말씀처럼 Mixed type이 항상 문제 인 것 같은데, 교수님께서 이야기하는 extended criteria와 indication의 차이처럼, Mixed type으로 나왔을 때 어떤 걸 dominant로 하는게 맞는가? 과연 지금처럼 %하는 것이 맞는가? 일단 한 세포가 MD나 PD로 변형되었으면 가장 안 좋은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지는 않는가? 저는 이런 고민이 됩니다.
예전 건국대 이선영교수님 발표 후 토론에서 일본에서는 예전에 pathologist의 기준이 가장 심한게 하나라도 있으면 심한 분화도로 표시했는데, 최근에 바뀌어서 우리나라 처럼 80%(MD) 20%(PD) 이런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뀐 가이드라인으로 판독하지 않아서 병리학자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고민과 함께, 이런 메일을 보내게 된 이유는 실은 교수님께서 보내신 테이블의 약자의 오해 때문입니다. 다행히 본문에서 풀어 써주시고, 논문도 들어가봐서 알게 되었지만
Pure differentiated type = PD
mixed predominantly differentiated type = MDHistology type이라는 항목에 이렇게 쓴 약자는 흔히 우리가 표기하는 Poorly differentiated, Moderate differentiated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저에게 EndoTODAY는 매일 공부할 수 있는 원동력과 주제가 됩니다. 꽃샘 추위 가운데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2016-3-26. 이준행 답변]
긴 fellow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발령받으신 것을 축하합니다. 아래 table의 PD, MD라는 약자가 혼란럽다는 지적 감사합니다.
사실 일본인들은 용어를 대충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교 문화권이므로 말(= 용어의 정의) 가지고 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일본은 훨씬 practical 합니다. 다소 이상하더라도 유용하면 계속 쓰는 것이 그들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early gastric cancer가 어디 early 합니까? 깊지 않을 뿐이지요. '일찍'이라는 뜻의 'early'와는 별 상관 없는 진단명입니다. 그냥 과거부터 써왔고 나름 유용하기 때문에 놔둘 뿐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벌써 바꿨을 것입니다. 일본은 이름을 잘 바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자주 바꿉니다. 그 중간이 딱 좋겠는데...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꾸는 그런 일은 일본에서는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70년째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선생님들은 미국을 추종하여 미국 논문을 읽고, 미국 학회에 가고, 미국으로 연수를 갑니다. 논문도 미국식으로 쓰고, 미국 저널에 발표합니다. 어떤 선생님들은 일본식으로 일하는 것 같은데, 스스로는 미국식이라고 주장합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미국에서는 미국식 의학이 표준이므로 혼란이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식 의학이 표준이므로 혼란이 없습니다. 미국인들이 이상하다고 말해도 일본인들은 끄떡도 않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다르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는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조금 과장하면 우리만 혼란스럽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의학'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미국도 일본도 정답이 아닙니다. 우리 환경에 맞는 '우리의 의학'을 추구해야 문제가 풀립니다. 광복 70년입니다. 이제는 의학도 독립해야 합니다.
지적하신 일본 논문의 애매한 약자에 대해서는 표 아래에 보충 설명을 붙였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2016-4-4. 한겨레] 8년만의 고백 “내가 황우석 사기 제보한 이유는…”]
[나들의 초상] 첫 제보자 ‘닥터K’ 류영준
나·들 바로가기
그를 지금의 그로 만든 건 분노였다. 10살 전신마비 소년에게 줄기세포를 주입하려 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시도였다.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자 아내는 “사안이 너무 커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망설이던 그는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과 피해를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왜 나인가”라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침묵의 대가’로 짊어져야 할 평생의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소년의 배에서 체세포를 뗀 건 그였다. 그를 대신해 재앙을 막아줄 사람은 없었다.
절박했다. 2005년 6월1일, 선택의 순간이 왔다. 원자력병원 레지던트 1년차인 그는 한 방송사 게시판에 글을 띄웠다. 이렇게 ‘제보자’가 됐다. 이후 그가 본 것은 대중의 광기였다. 지식인도 정치인도 언론도 그의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을, 과거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들은 ‘의심의 대상’ 대신 그를 의심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명성은 한 줌 바람에 날아가고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MBC < PD수첩 > 게시글 중 일부)는 그의 신념은 결국 실현됐다.
그 뒤 8년. 그가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나·들>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제 내 이야기도 들어달라.” 소박한 일성이었다. 그는 황우석 신화를 무너뜨린 ‘류·영·준’(42)이다. ‘닥터K’로 알려진 그는 현재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이자 줄기세포 연구자다. 8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그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러던 그의 눈빛이 딱 한 번 흔들렸다. 10살 소년을 얘기할 때였다.
닥터K 8년 만에 커밍아웃
왜 8년이 지난 지금일까? 좀더 일찍 세상으로 나오거나, 아니면 영원히 가슴에 묻어둬도 될 일이었다. “왜 지금 이냐고 물으면 나도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감정을 추스를 때가 되면 내 이야기를 하려 했다. 내년이면 황우석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된다. 이미 그 의미를 되짚어보려는 이런저런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 사건이 생명윤리나 과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실제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계기다.”
지난해 교수로 임용돼 안정된 신분을 갖게 된 것도 8년 만의 ‘커밍아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난 12월, 사건 당시부터 그에게 도움을 줬던 생물학 연구자들의 인터넷 학술 커뮤니티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 게시판에 실명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과학잡지 <네이처>와 짧게 인터뷰도 했다.
황우석의 가면은 벗겨졌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연출한 무대에서 주연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의 일터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경기도와 종교단체 등의 지원을 받아 복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류영준은 ‘무학의 통찰’이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황우석에 대한 단죄를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잘못된 사실관계와 오해 때문에 그의 덫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황우석만 말을 했고 대중은 그의 시각과 프레임으로 사건을 구성했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다른 이야기도 차분하게 들어봐야 한다.”
황우석은 연구논문 조작을 ‘의대 대 수의대’ ‘미국 대 한국’ ‘불교 대 기독교’의 싸움으로 치환했다고 그는 진단했다. ‘제보자 때문에 국익이 날아갔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호령할 기회를 놓쳤다’와 같은 애국적 과학주의가 그중 하나다. 류영준은 이를 소설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틀을 바꾸고 싶어 했다. “이 싸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됐다. 아주 간단했다. 한 사람의 목숨 앞에 누가 그런 말들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느냐. 그러나 황우석에게는 이 문제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과학은 사회적 명성과 평판을 얻으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거짓 결과물로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적 권력을 얻는 것이었다. 연구자로서의 순수성이나 호기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우석 사건은 ‘과학조작 스캔들’이었다. 굵직한 사실관계는 드러났고 과학계의 판단이 내려진 지도 오래다. 그러나 황우석은 과학의 문제를 ‘감성의 법정’으로 이끌고 갔다. “역사를 판단할 때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고 그에 따른 해석이 뒤따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황우석을 둘러싼 대중의 반응에는 수많은 오류가 보인다. 또한 감정적 반응은 논리적이고 건설적인 해석을 불가능하게 한다. 내가 나온 이유는 아직까지 사실관계를 잘 모르거나 한 부분만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배아줄기세포 꿈을 안고 ‘황사단’에
류영준은 자신의 이런 생각을 <나·들>에 서사로 펼치기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와 황우석이 인연을 맺은 건 1999년이다. 두 해 전 의대 본과 4학년이던 그는 <네이처>에 실린 영국 복제양 ‘돌리’에 관한 논문을 보게 된다. 이듬해인 1998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제임스 톰슨 교수가 쓴 ‘인간 배아줄기세포’ 수립 논문은 그를 임상의사가 아닌 기초의학 연구자의 길로 안내했다. 두 논문을 접목하면 환자 치료에 사용할 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엔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실험실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일본 도쿄대 줄기세포연구소 등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전자우편을 보냈다. 황우석만 답을 해왔다. 강연차 부산에 들르니 그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황우석은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로 명성을 얻고 있던 때였다. “그날 황우석을 처음 보게 됐고 강연은 감동적이었다. 나를 대하는 눈빛도 따뜻했다. 이듬해 결혼을 앞둔 아내 이유진도 함께 인사를 했다. 황 교수는 바로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긴 이야기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 나누자고 했다.”
서울로 찾아간 예비부부를 황우석은 ‘의사-간호사 부부’라며 반겼다. 게다가 그때까지 의대생이 수의대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는 없었다. “내 계획을 듣고 난 황 교수는 연구팀에 합류하면 진로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류영준과 황우석은 그날 이후 돈독한 사제 관계를 맺었다. 류영준이 실제 황우석의 실험실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한 건 2년쯤 뒤인 2002년 3월1일이었다. 기초 의학자의 길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최소한 의대 인턴과정은 마쳐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황 교수는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어떤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제야 막 돼지 줄기세포를 만들려던 단계였다. 막막했다. 모든 걸 내가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험실 청소부터 시작한 류영준은 두 달쯤 뒤 연구실의 대표 실적인 ‘영롱이’와 ‘진이’ 논문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소 연구팀장을 맡았던 선배에게 논문을 달라고 요청했다. 한숨과 함께 돌아온 답은 ‘그런 건 없다’였다.” 류영준은 이 사건 이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거짓과 조작의 냄새였다.
얼마 뒤 류영준은 다른 선배 연구원에게서 더 자세한 내막을 들었다. 황 교수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가 지금 1등을 뺏기면 끝이다. 나중에 우리가 실력을 쌓아서 진짜로 복제하면 된다’고 답하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복제 연구 경쟁 상대인 축산기술연구원에서 조만간 복제소가 태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황우석이 입수한 것이다. 황우석의 연구실에서 일했던 또 다른 연구원 역시 <나·들>과의 인터뷰에서 “황우석에겐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1등을 하기 위해 거짓말부터 하거나 논문을 조작하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류영준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왜 항의하거나 실험실을 떠나지 않았을까? “내 입장에선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온 만큼 큰 승부수를 던진 거였다. 또한 소 연구 파트와는 팀이 달랐기 때문에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타협하고 외면했던 거다.”
황우석은 의대 출신에다 자신보다 일찍 실험실에 나와 밤늦게 귀가하는 류영준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보통 4년차 연구원이 맡는 팀장을 3개월 만에 맡겼다. 당시 석사 월급이 40만원이었지만 그는 박사급 대우인 150만원을 받았다. 이런 고속승진과 황우석의 특별대우는 같은 실험실에 있던 동료 연구자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팀장이 된 류영준은 황우석의 도움을 받아 외부에서 팀원을 영입했다. 나중에 논문 조작의 실무 책임자로 밝혀진 미즈메디병원 출신의 박종혁과 김선종, 그리고 자신의 아내 이유진을 비롯해 구자민, 박을순 등 모두 6명이었다.
또 황우석이 줄기세포를 잘 모르는 상황이라 당시 미국 뉴욕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연구소’에 있던 조재진 교수를 지도교수로 영입했다. 연구용 난자는 미즈메디병원과 한양대병원에서 제공받았다. 이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성 연구원들의 난자를 실험에 이용한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면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원들은 왜 자신의 난자를 제공해야 했을까?
류영준은 이를 “무언의 압력과 박을순의 야심” 때문이라고 했다. 박을순 연구원은 황우석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 때문에 황우석은 그녀의 이름을 논문에 넣지 않으려 했다. “박을순은 뭔가를 보여줘야 할 상황이었다. 황 교수가 그녀의 처지를 이용해 난자제공에 무언의 동의를 한 것으로 보고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하늘을 감동시켜야 성과가 나온다’며 계속 기다렸다.”
“NT-1은 자가생식 산물… 황은 조작 강요”
결국 박을순 연구원은 난자를 제공했고 자신의 난자로 자신이 핵이식을 하는 ‘윤리적 비극’이 일어났다. 조사 당시 그녀가 동료 연구원에게 보낸 전자우편을 보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셀프 클로닝(자신의 난자로 체세포 복제 실험을 하는 것), 이건 있을 수 없는 일, 자신의 난자를 자신이 복제하고 지독하게 독해요. …선생님께 대적하지 못했던 것, 이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도록 더 열심히 공부할래요.” <나·들>과 만난 당시 황우석 교수의 연구원들은 한결같이 그때를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으로 기억했다. 연구원들 모두 자신과 동료를 ‘황우석의 피해자’라고도 했다. 한 연구원은 황우석의 압력을 ‘날카로운 송곳의 끝’에 비유했다. 논문 조작을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압박을 견뎌내기 힘들어 논문을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 여성 연구원은 자신이 맡은 핵이식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짐을 싸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연구원이 핵이식 연습을 하던 중에 줄기세포가 만들어졌다. 바로 NT-1이다. 딱한 처지의 박을순 연구원을 위해 그녀의 공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녀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문제는 검찰에서도 조사가 이뤄졌지만, 박을순은 끝까지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떻든 줄기세포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세포는 있었지만 잘 자라지 못하는 상태였다. 강성근 교수가 주도했던 복제 검증 실험도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논문을 싣기로 한 <사이언스>에서도 NT-1이 줄기세포임을 확신할 수 없으니 이런 내용을 논문에 넣자고 제안했다. 류영준은 “나는 자가생식만으로도 세계적 업적이 될 수 있고 치료용으로 쓸 수 있다고 했지만, 황우석은 핵이식이 아니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처음부터 데이터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꾸밀 생각이었다. 결국 논문 초록 끝에 그 가능성을 한 줄 언급하는 정도로 타협이 이뤄졌지만 황우석은 그것조차 기분 나빠했다. 내가 논문 초안을 작성해 보낸 이후 그의 지시로 데이터가 조작됐다는 걸 사건이 터진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후일 서울대 조사위원회와 학자들은 이 세포가 체세포 복제가 아닌 자가생식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렸다.
황우석은 또 다른 한편에서 2004년 NT-1 <사이언스> 논문의 사진을 중복 게재해 조작한 박종혁과 2005년 줄기세포 전체를 바꿔치기한 김선종에게도 압력을 가했다. “박종혁과 김선종은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면 연구자로서 인생이 끝이라는 궁박한 처지에 내몰려 있었다. 그들에게 가해진 황우석의 압력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황우석은 박종혁과 김선종의 박사학위 수여에 깊이 관여했고 이를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다.”
과학은 ‘객관을 전제로 한 정확성’의 학문이다. “믿는다”가 아니라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황우석은 왜 논문이 아닌 언론으로 자신의 연구를 증명하려 했을까? 류영준은 황우석이 “노벨상에 눈이 멀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3년 <사이언스>에 논문 게재가 받아들여진 뒤 들뜬 황 교수가 나에게 노벨상을 공동수상하자고 했다.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황우석의 노벨상 집착증은 과대망상 수준이다. 사건이 일단락되고도 한참이 지난 2009년 3월, 그가 지지자들 앞에서 모조 노벨상 메달을 꺼내들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이미 2년간의 검증을 마치고 갔다. 줄기세포를 재현만 할 수 있다면 언제든 노벨상을 주겠다며 이 메달을 나에게 보냈다. 그런데 정부가 난자 연구 승인을 안 해줘서 못하고 있다.”
진실의 문과 도망자의 삶
류영준은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사이언스>에 논문 게재 승인이 이뤄지자, 결심했던 대로 아내와 함께 실험실을 떠나, 2005년 3월부터 원자력병원 레지던트로 일하게 됐다. 류영준은 “황우석이 어떤 거짓말을 하든 이제 나와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흔들 만한 순간이 왔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되기 한 달 전 지인에게서 황우석 팀이 11개의 복제 줄기세포를 만들었고 곧 임상실험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핵심 인력이 모두 황우석을 떠난 상태에서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걸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곧이어 들은 소식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황우석이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10살 소년에게 조만간 임상실험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류영준과 그 소년의 관계는 각별했다. 2003년 병원에 찾아가 소년의 체세포를 직접 떼어 온 이가 그였다. 그와 아내는 소년의 줄기세포만은 반드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부모에게 아이의 사진을 부탁해 책상에 붙여둔 채 실험을 했다. 그러나 실험실을 떠나기 전에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잘못하면 그 애가 다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줄기세포를 넣어서 신경을 살린다는 것인데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아무런 검증이 안 된 상태였다. 면역반응이 나타나거나 암에 걸릴 수도 있었다.”
황우석이 임상실험까지 성공해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무리수를 두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11개는 뻥튀기겠지만 최소한 소년의 체세포로 만든 줄기세포는 있을 것으로 믿었다. “마음이 급했다. 과거 연구팀에서 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잘못되면 나중에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 대신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고민했다. 문신용 교수나 안규리 교수, 노성일 원장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절박했다.” 그의 눈두덩이 붉어졌다. 황우석의 행동에 분노한 그가 찾은 곳은 MBC < PD수첩 >과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였다. < PD수첩 >은 이후 난자윤리, 줄기세포 조작을 확인해 보도했다. 참여연대는 제보자 보호와 지원을 맡았다. 황우석의 애제자였던 류영준은 왜 스승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황우석 지지자들은 이를 두고 “2005년 논문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진 데 불만을 품고 스승을 파멸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2005년 논문은 류영준이 이미 실험실을 떠난 뒤 작성된 것이다.
류영준은 “실험실을 떠난 건 황우석의 실체를 알고 그 사람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세 차례에 걸쳐 실험실 지도교수였던 조재진 교수에게 나의 우려를 전했다. 두 번은 중간에서 이병천 교수와 강성근 교수가 전달하지 않았고, 마지막은 황우석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만약 황우석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 오히려 이를 은폐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제보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바뀌고 말았다. < PD수첩 >이 방영되고 얼마 뒤 ‘제보자는 전직 연구원’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황우석의 광적인 지지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절도, 환자정보 유출 혐의로 고소·고발도 이어졌다. 더 이상 병원 일을 할 수도,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기자들이 집과 병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는 부산 처가에 맡겼다. 참여연대의 지원을 받아 찜질방, 지인의 집, 서울 신림동 오피스텔을 떠돌아야 했다.
결국 그는 < PD수첩 > 방영 뒤인 2005년 12월6일 원자력병원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열흘 전쯤인 11월23일부터 한 방송사 카메라가 병원에 들이닥쳤다. 환자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휴가를 내고 잠시 피신해 있었다. 병원을 갈 수 없는 날이 길어졌고, 12월4일 < PD수첩 >의 취재윤리 문제가 불거지자 병원 쪽은 “더는 방어해줄 수 없다. 그나마 파면을 시키지 않는 게 경력에 좋다”며 압박했다. 과학기술부 산하 병원인 이곳 원장실에 과기부 고위 공무원과 국가정보원 직원이 다녀갔고, 그 둘이 제보자임을 확인해줬다고도 했다. 압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도 병원 쪽 관계자는 “그렇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후 1년6개월가량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부부 모두가 사실상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나마 빚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브릭과 참여연대 등에서 모금해 전달받은 돈이 수입의 전부였다.” 그사이 류영준은 < PD수첩 >의 취재 지원에 나섰다. 과학적으로 황우석의 줄기세포 조작을 입증하는 건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줄기세포와 체세포 제공자의 DNA를 비교하면 되는 것이다. 어렵게 10살 소년의 머리카락을 확보한 < PD수첩 >팀의 다음 과제는 황우석 실험실에 있는 줄기세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황우석이 이를 내줄리 만무했다. (황우석은 뒤늦게 < PD수첩 >팀에 검증용 줄기세포를 내주었다.)
제보자로 매국노로 산 8년, 참 쓰다
류영준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아내가 일하던 서울대 치대 실험실에 2005년 논문의 첫 번째 줄기세포인 NT-2의 배양접시가 분양돼 온 것이다. 황우석의 수의대 제자이자 줄기세포팀을 맡고 있던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황우석은 NT-2가 그 소년의 체세포로 복제한 것이라고 주장한 터였다. “세포를 훔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휴지통을 뒤져 배양된 뒤 버린 접시를 가지고 나와 < PD수첩 >팀에 건넸다.” 나중에 이를 안 황우석 지지자들은 아내를 절도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 PD수첩 >과 류영준은 진실 규명의 명운이 걸린 최대 고비를 맞고 있었다. 소년의 DNA와 줄기세포 DNA가 일치하면 그들은 파국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 PD수첩 >은 양쪽에서 얻은 세포를 여러 기관에 맡겨 DNA 검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줄줄이 판정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냈다. 황우석이 내준 줄기세포들이었다. 그는 “마지막 한 곳에서 결과가 왔지만 < PD수첩 >팀은 검사지를 열어볼 엄두도 못내고 자리를 피했다. 나 혼자 열어봐야 했다. 같은 세포가 아닌 걸로 나왔다. 그걸 본 순간 ‘이제 아무도 안 믿어도 좋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믿어주는 사람이 몇 명이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 PD수첩 >의 네 차례 방송이 나간 뒤 2006년 1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류영준은 두 기관의 조사 과정에 증인, 참고인 신분으로 참여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핵이식에 의한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다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원천기술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9명의 검사를 포함해 50여 명의 수사인력을 동원한 검찰 역시 황우석을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류영준은 처음엔 공범으로 피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검증도 가혹했다. 강성근 등과는 대질 심문도 받았다. 그러나 황우석과는 끝내 마주치지 않았다. “황우석이 인정했거나 다른 사람과 나의 진술이 일치하는 게 많으니까 굳이 대질을 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황우석의 과학 사기를 밝혀낸 또 다른 집단은 젊은 연구자 그룹 ‘브릭’이다. 돈과 진실을 바꾸며 침묵했던 과학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난자윤리와 논문 조작의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사이언스>가 논문을 철회할 때도 이들의 증거가 바탕이 됐다. ‘어나니머스’ ‘아릉’ 등의 닉네임으로 활동한 그들은 정부출연기관·대기업 연구자, 생물학 전공자, 수학과 교수 등이었다. 브릭 운영자 이강수씨는 <나·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연구 부정에 대해서는 그에 따른 제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계에선 불문율이다. 법적인 제재보다는 과학계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논문을 조작하면 연구를 검증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과학 전체가 붕괴되는 거다. 황우석 사건은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바뀌었을까? 과학은 진실을 발견하는 좀더 나은 방법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이를 되새기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류영준에게 빚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선 여전히 그의 폭로가 앞서나가던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의 발목을 잡고,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희망을 꺾었다고 본다.
그에게 반론을 청했다. 답은 단호했다. “한국이 줄기세포 강국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2004년 황우석이 <사이언스> 논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언론은 ‘미국의 심장에 태극기를 꽂고 왔다’는 식으로 부풀렸다. 올해 초 <네이처>는 한국이 줄기세포 분야에서 약간의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연구에 강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과학은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다르다. 그 자체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언론이 키워온 거품이 대중의 상실감을 키운 것일 뿐이다.”
줄기세포 분야는 지금도 국가의 많은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연구 성과는 없다. 줄기세포의 미래 역시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줄기세포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세력과 애국주의적 언론이 대중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의 국제적 흐름은 배아줄기세포에서 역분화줄기세포로 넘어간 지 오래다. 배아줄기세포는 인간 난자, 그것도 20대의 젊은 난자를 사용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실용화가 어렵다. 그런데도 국익론·특허 등을 내세워 복제 줄기세포가 최고라고 하는 건 혹세무민이다”고 했다. 또 “난치병 환자들이 관심을 둘 곳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자와 의사들이다. 그리고 과학자라면 거짓 희망보다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로 말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년의 수술 막은 것만으로도 행복”
내부고발자로서 지난 8년간 그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에 대해 “한 사람이 튀어서 조직을 위험하게 하면 안 된다는 전체주의 교육의 세례자”라면서도 “제보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10살 소년의 수술을 막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설사 내가 묻힌다고 해도 그것만 막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씁쓸했던 경험들까지 가슴에 묻지는 못했다. 2007년 3월, 2년여 공백 끝에 가까스로 고려대 의료원에 들어갔지만 일부 교수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경계도 심했다. 그가 다가가면 하던말을 멈추기도 했다. 그는 “배신자라는 낙인을 불식시키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인간적인 신뢰를 얻어야 했고 실력으로도 증명받아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나를 보여주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상처를 후벼파는 기억이란 참으로 고통스럽다. 아픈 기억을 꺼내 성찰할 수 있어야 경험은 공유되고 보편화된다.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남을 비판할 때 나머지 손가락 가운데 적어도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그가 전하는 말이다. “황우석 사건은 과거 한국이 정치·경제·사회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생존과 발전’이라는 절대 목표에 복종하면서 벌어진 비윤리적 행태였다. 젊은 과학자들은 기성세대의 잘못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글 이재명 <이코노미 인사이트> 기자 miso@hani.co.kr, 손은민·오다인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억울하다 나에 대한 비방들이
류영준 교수는 자신에 대한 몇몇 오해를 적극 해명하고 싶어 했다. 황우석 사건 논란이 한창이던 때 황우석의 지지자들이 문제 삼은 것들이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탓에 반론을 할 수 없었다. 불명예와 억울함에도 8년 동안 침묵해야 했던 것이다. 그중 몇 가지를 골라 그에게 답변을 요청했다. 그는 또 황우석 사건을 앞뒤로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류영준은 황우석 연구실 생활에 적응을 못해 불성실했다.
=황우석 실험실의 생활은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 나는 황 교수보다 먼저 출근해 늦게 퇴근했다. 설날과 추석 연휴에 고향인 부산에 가는 일 외에 휴가라곤 없었다. 실험을 위해 도축장과 병원을 오가는 생활만 반복했다. 일각에선 성적이 나빠 유급했다고 하는데 실험실을 떠날 당시 A학점 이상이었다.
-다른 연구원들과 불화가 많았다.
=황우석 실험실엔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도 황우석 교수는 전혀 위계나 체계를 잡지 않아 실험실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소·돼지·호랑이·개 복제팀 그리고 줄기세포팀으로 나눠져 있어 갈등과 알력도 있었다. 황 교수는 이를 활용했다. 서로 이간시켜 자신에게 잘못을 보고하도록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선임자에게는 책임만 있고 권리는 빼앗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류영준이 정의와 진실을 내세우는 동안 황우석의 원천기술이 외국으로 흘러갔다.
=체세포 핵이식에 대한 황우석의 특허 초안은 내가 작성했다. 국제특허를 위한 보정도 내가 도와 겨우 이뤄졌다. 나는 서류에 발명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내가 발명한 특허를 외국에 넘겨줬다는 해괴한 논리는 사실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낸 소설이다.
-미즈메디병원의 주요 자료를 개인 실험노트에 적어 빼돌렸다.
=실험노트는 연구자 개인의 것이다. 개인이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적는다. 팀 안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각자의 노트에 자기가 한 일을 적는다. 우리는 팀원이 5명이라 실험노트도 5권이다. 내가 실험실을 떠날 때 실험에 대한 모든 내용을 복사해 실험실에 두고 나왔다. 황우석이 내 노트가 다시 필요했다면 당장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아무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제2저자인 2004년 <사이언스> 논문도 조작으로 결론 났다. 류영준도 사기꾼 아닌가.
=2004년 논문에서 조작된 부분은 세 가지였다. 사진과 부계모계유전자동시 발현검사, 체세포와 줄기세포 유전자 비교일치검사였다. 사진은 박종혁이 잘못한 부분을 인정했고, 부계모계유전자에서 둘 다 발현돼야 함에도 실험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황우석에게 이를 사실대로 보고했지만 묵살했다. 이후 강성근 교수가 황우석의 지시하에 데이터를 조작한 사실을 사건이 터진 뒤 알게 됐다.
-MBC < PD수첩 >이 ‘황우석 죽이기’에 협조하는 대가로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약속했다.
=오히려 황우석 편에 있으면 더 이익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다. 교수도 더 빨리 됐을 것이다. MBC가 학계에 있는 나에게 어떻게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겠는가.
-배반포가 있지 않았는가.
=황우석이 실험을 통해 모양이 좋은 배반포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은 증명이다. 아무리 간단해도 남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진의 배반포가 핵이식에 의한 것이라면 증거를 대야 한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기억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의대 시절 온몸으로 기독 의사의 삶을 보여줬던 고 장기려 박사,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서 정신적 가르침을 준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실제 함께 황우석 사건을 겪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에 가르침을 준 황상익 서울대 인문의학과 교수, 병리과 의사로서 의사의 길을 다시 걷게 해준 김한겸 고려대 병리학과 교수,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김병수 박사 가족, MBC < PD수첩 > 최승호·한학수·김보슬·김현기 PD, 그리고 아직 말할 수 없지만 많은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현재 강원대 병리학교실에서 줄기세포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를 통해 줄기세포에 대해 기본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싶다. 또 실험에 필요한 인체조직을 공급하는 정부 주도 연구 인프라인 ‘한국인체자원은행사업’에도 참여 중이다. 올해부터 강원도 지역 단위 은행장을 맡게 됐다. 연구자들이 어려워하는 법적·윤리적 문제에 대해 조언해주고 친절한 동반자가 되고 싶다. 병원에서 조직·세포·분자 검사 등 환자 치료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16-8-27. 조선일보] [박철완의 IT정담] 실적 좋고 실력 없는 가짜 석학의 시대
내용이 좋아서 일부를 옮깁니다. 전문은 여기를 보세요.
"'난제 해결 능력이 없는' 석학은 껍데기다. '나쁜 인용'과 갖은 사술을 통해 '실력이 아니라 실적만 쌓은 사람이 석학 대우받는 나라의 학계는 미래가 없다. 이론에서 현장까지 두루두루 꿰뚫는 실력자가 외려 석학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원래 과학이란 게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설명해야만 하는 것임에도, 대단치도 않은 실력으로 과학 대중화 등 대외 활동에 치중하는 것보다 이 나라의 과학기술을 이끌어 갈 실력 있고 내실 있는 후학을 양성하는 어려운 미션에 힘써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석학이라 칭할만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칼럼은 위의 네 분 중 필자의 박사 논문 심사 위원장이셨던 장정식 교수께서 필자의 박사 논문 종심 때 해주신 말씀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대학교수에게 있어 박사 제자를 배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이 어딨습니까?" 학자에게 있어서 '나쁜 인용'이나 '좋은 저널'로 쌓인 실적은 '과거'일 뿐이다. 앞에 떨어진 난제를 해결하는 본인의 실력이 '현재'이고, 그의 실력 있는 제자들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실적 좋고 실력 없는 가짜 석학에겐 과거는 있을지라도 현재와 미래는 없다. 실적 좋고 실력 없는 가짜 석학을 우리는 '폴리페서', 혹은 '폴리서처'라고도 부른다. 이들이 일종의 '대행사' 성향의 무늬만 학자에 다름 아니다. 우리 내부의 문제를 먼저 솔직히 인정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검토하고 나가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이제라도 하나씩 고쳐 미래의 방향을 잘 잡아 가도록 하자."
[2016-9-29. 사이언스 온] ‘논문생산성’ 문화, 기성연구자-젊은연구자에 다른 영향
주로 연구자의 성과는 논문 출판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연구자사회에선 일찌감치 논문 출판을 독려하거나 그 흐름을 꿰뚫어보려는 여러 이야기가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출판하라, 아니면 사라지리라(Publish, or Perish)”라는 말이 있다. 각고의 연구결과를 담아 논문으로 발표한 뒤에 그것이 연구자사회에서 많이 인용될수록 연구자는 높은 신용 또는 명성이라는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 신용 또는 명성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명성을 얻은 연구자는 명성의 효과로 더 자주 인용되고, 그렇지 못한 신진 연구자는 무명 탓에 덜 인용된다는 부익부 빈익빈의 “마태 효과”(Mattew Effect,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성경 마태복음 25장 29절)라는 말도 있다.
논문생산성이 클수록 논문이 많이 출판되어 좋은 논문도 많아지는 걸까? 최근 방대한 연구자 학술정보의 데이터베이스를 살펴 논문 출판 수와 인용 수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캐나다와 네덜란드 연구자는 과학저널 <플로스원(PLoS ONE)>에 발표한 논문에서, 1980-2013년에 논문을 낸 2807만여 명 연구자의 학술 정보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연구 경력이 많은 연구자들에선 많이 출판할수록 많이 인용되는 논문의 출판비율도 높다는 패턴이 나타나며, 젊은 연구자들에선 이런 패턴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음은 논문의 초록 일부이다.
“1980-2013 기간에 걸친 연구자 28,078,476명의 방대한 데이터를 사용해서, 우리 논문은 평균적으로 개인 연구자가 출판한 논문 수가 많을수록 가장 많이 인용되는 그룹에 들어가는 논문의 비율이 더 커짐을 보여준다. 이런 연관성은 예전 연구자 집단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며, 근래 연구자 집단에서는 그 규모가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된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런 결과는 기성 연구자한테선 될수록 많은 논문을 출판하는 전략이 높은 인용지수 논문의 출판 비율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지 않았지만 그런 패턴이 젊은 학자들한테선 늘 관찰되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논문)
논문 출판 수와 인용 수의 패턴에 어떤 세대차가 있는 걸까? 논문을 보도한 <더 사이언티스트(The Scientist)>의 뉴스를 보면, 1980-1985년에 첫 논문을 냈던 나이 든 연구자 집단에서는 연구자가 출판한 논문 수가 늘수록 가장 많이 인용되는 상위 1% 논문의 출판비율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패턴은 의생물학 분야, 자연과학 분야, 법·예술·인문학 분야, 사회·행동과학 분야 가운데 의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논문을 다량 생산할수록 주목받는 논문의 출판비율도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이런 패턴이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활동에선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사이언티스트>의 보도를 보면, 2009-2013년 기간에 첫 논문을 낸 신진 연구자 그룹에선 30편 넘게 논문을 낸 경우에 상위 인용 논문의 출판비율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조사 결과에서, 논문의 질과 인용지수를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이런 해석보다는, <더 사이언티스트>가 보도했듯이 덜 알려진 신진 연구자가 낸 논문의 가치가 발견되고 인용되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데 비해, 다른 연구자들이 자기 논문의 출판 기회를 높이려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이미 널리 알려진 저명 저자의 논문을 지속적으로 인용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일종의 마태효과와 연관된 해석으로 여겨진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논문을 많이 내지 못하는 연구자들은 학계를 떠나고 연구역량을 인정받은 나이 든 연구자들이 학계에 남아 지속적으로 많은 논문을 내는 게 현실이기에, 그런 나이 든 연구자의 논문이 더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논문 다량 생산의 전략은 경륜 있는 연구자들한테 훨씬 더 유효한 것일 수 있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다른 측면에서는 신진 연구자들한테 무작정 다량의 논문을 발표하기를 요구하는 문화는 연구자사회에 좋은 논문을 양산하는 데에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출판하라, 아니면 사라지리라” 식으로 논문 다량 생산을 독려하는 문화는 학계 전반에 좋지 않은 요인이겠지만, 무엇보다 젊은 연구자들한테 더 해로울 수 있다고 이번 논문의 저자는 <더 사이언티스트> 보도에서 지적했다.
[2017-1-30]
역사학자 심재훈 교수의 Facebook posting에서 옮긴다.
"그의 역사 연구 편력을 돌아보며 “편협한 자국중심주의 역사 깨기”가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역사학의 생산 양식을 넘어서 유통과 소비 양식에까지 주목하는 이른바 ‘퍼블릭 히스토리’가 그 대안이 될 수 있고, 그는 이 책 역시 그것들 중 하나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스스로 말하는 이 책을 쓴 더 큰 의도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한국 인문학의 생태계 복원에 작은 계기라도 제공하기 위함이다. 최근 한국 학계를 주도하는 이른바 A&HC와 S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대한 집착은 서양 콤플랙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서구의 이론에 한국의 경험연구를 적용시키며 서양학문에 대한 종속성만 강화시킬 뿐이다.
자신의 연구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를 넘어서는 길은 자기 사회에 대한 고민을 국제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독창적 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추상적 이론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의 경험을 특수화시키는 대신 글로벌한 맥락에서 놓고 볼 수 있는 세계사적 안목과 정치한 이론이 필요하다. 다양한 언어 능력이 전제됨은 물론이다."
[2017-3-15. 청년의사] 스타급 암연구자의 논문에서 드러난 웨스턴 블랏 이미지 조작
국립 강릉 원주대학교 강명신 교수가 청년의사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옮깁니다. New York Times에 실린 기사를 요약, 해설한 것입니다.
"미국의 스타급 암연구자인 닥터 카를로 크로체(Carlo Croce)가 과학적 부정행위(scientific misconduct) 고발 사례로 논란이 되고 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 교수로 2004년부터 재직 중인 그는 국립과학원의 멤버이기도 한데, 현재까지 책임연구자로서 연방정부로부터 받은 연구비만 8,6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찬란한 성공 이면에 논란도 많았는데,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에 있는 그의 랩에서 벌어진 드라마가 세간에 드러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연방정부와 주정부 자료, 내부고발자의 제보, 그리고 학술지와의 서신을 통해 데이터 변조 등의 과학적 부정행위의 고소고발 문제를 계속 방어해 온 사실을 보도했다.... (중략) ... 워싱턴 대학교 미생물학 교수인 닥터 페릭 팽 (Ferric Fang)은 1990년대 이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직접 찍어서 외부 전문가에게 보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없다가 2003년 무렵부터 급증했다고 한다. 2003년은 Adobe Creative Suite라는 소프트웨어가 나와서 자신의 랩탑에서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된 해라고 한다. ORI의 전 국장인 데이빗 롸잇 (David Wright)은 이미지 데이터에서 이 정도 문제가 심각한 것이고 연구분야 전체에서 사기 (fraud) 행위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학계를 주도하는 인물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전체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고 사기 (morale)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과학계와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를 해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New York Times 기사에는 duplication된 lane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구자의 부정 행위에 대한 조사는 연구자가 소속된 기관의 몫입니다. 그런데 연구자의 소속 기관은 엄청난 이해관계("a tremendous conflict of interest")를 가지고 있어서 사건을 덮으려는 유혹("There’s a terrible temptation to bury it all.")을 받습니다. 부정 행위를 한 연구자가 정부로부터 fund를 받으면 그 중 상당부분을 overhead로 대학 당국이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Carlo Croce의 부정에 대한 고발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연구자와 부정한 대학이 만든 합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구 관련 윤리 위반은 그야말로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Carlo Croce가 사는 집의 벽에는 Italian art collection이 걸려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부정한 연구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합니다.
Randy Schekman 교수가 이야기하였던 바와 같이 (EndoTODAY 셰크먼 교수의 쓴소리에 대하여) 연구에 따른 inappropriate incentive가 주된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연구는 자기가 좋아서 해야지 돈 때문에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2017-5-20] 데이터 조작… 서울대 교수·대학원생 논문 5편 철회 '국제 망신'
서울대 교수와 대학원생 제자가 조작된 실험 데이터를 논문에 반복적으로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이 유명 국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5편도 철회됐다.
17일 연구 부정행위 감시 사이트인 리트랙션워치(Retraction Watch)와 서울대에 따르면 서울대 공과대학 A교수와 제자인 대학원생(박사과정) B씨는 지난해 2월 반도체의 일종인 '강유전체 램(RAM)'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논문을 세계적 학술지인 '국제물리학회지'에 게재했다. B씨가 제1저자, A교수가 교신저자(논문 저술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로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2015년 8월 국제 학술지 '전자소자학'에 발표했던 논문의 도표 여러 개를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가져다 썼다. 더구나 이 도표들도 조작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국제물리학회지'는 해당 논문의 게재를 철회했다. 이후 A교수와 B씨는 조작 데이터를 활용해 '사이언티픽 리포트'와 '응용물리학회지' 등 세계적 학술지에 게재했던 논문 4편도 자진해서 철회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6개월의 조사 끝에 학술지 게재가 철회된 논문 5편을 포함해 두 사람이 함께 낸 논문 8편에 조작된 데이터가 쓰인 사실을 지난 2월 확인했다. 또 B씨가 데이터를 조작했고, A교수는 이를 몰랐지만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대 관계자는 "조만간 징계위원회를 소집해 두 사람에 대한 처분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공대의 한 교수는 "논문을 자진 철회하는 것은 저자들이 논문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당사자들에게도 불명예지만 국제 학계에서 한국 학자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국내의 다른 학자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들 이제 숫자 놀음 좀 그만하자 [한국일보. 2017-6-30]라는 눈의 확 띄는 제목의 컬럼이 있어 소개합니다. 일전에 한 유명 대학교가 '세계대학평가'에 제출할 자료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는데 (XX대, 세계대학평가 자료 조작…대학 서열화·순위 집착의 그늘), 지나치게 숫자에 집착하는 문화 때문일 것입니다. 숫자만큼 허망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숫자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대학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역량과 성과, 행복 등을 숫자로 표현하고 순위를 매기는 데 익숙해졌다. 숫자로 표현되고 순위가 매겨지지 않으면 가치를 두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불신일 것이다. 어떠한 잣대로든 성과를 측정하고 평가하여 관리하지 않으면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평가 대상에 적용될 수 있고 계량화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찾다 보니, 그 과정에서 평가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계량화하기 힘든 역량, 성과, 기여 등은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기 위해 출발선에 서는 그 순간부터 원하든 원치 않든 평생을 순위에 얽매여 살아간다.
대학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인용색인(SCI)과 사회과학인용색인(S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논문을 몇 편이나 게재했는지, 연구과제를 얼마나 수주했는지를 기준으로 교수를 평가한다. 그들이 저술한 책과 논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멘토로서 학생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식인으로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과 방송에서 인터뷰한 내용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국내외 언론에서 매년 발표되는 대학 평가에서 몇 단계라도 순위가 하락하는 날에는 학교 전체가 초상 분위기다. 그리고 대학은 서둘러 교수들의 인사 기준이 되는 논문 편 수와 과제 수주액의 기준을 높여 차년도의 순위 상승을 꾀한다.
모든 대학은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과 성장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대학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을 보면 여전히 2차 산업혁명의 틀 속에 갇혀 있는 듯하다. 인위적 교과과정 개편, 교원 인사 요건 강화 등을 통해서 보다 적은 비용으로 짧은 기간에 대학 평가 순위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차 산업혁명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대학 평가 기제 속에서 더 나은 평가를 받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논문 몇 편 더 게재하고 연구비 수주액 몇 푼 더 늘리는 것보다 과감히 대학 평가의 굴레에서 벗어나 교육의 틀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2차 산업혁명 이후, 분업화한 각 영역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인력을 대량으로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늘날의 교육기제는 더 이상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40, 50년 전의 대학 성적표와 오늘날의 대학 성적표를 비교해 보면 전공명도 과목명도 크게 바뀐 것이 없다. 그리고 대학 순위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느린 영역이 대학 사회가 아닐까? 대학의 운영 주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보직 임기 중에 대학 평가에서 순위가 하락하는 것을 감수하고 새로운 틀을 마련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대학은 패스트 팔로어가 아닌 퍼스트 무버로 거듭나야 한다.
대학 평가의 목적은 평가 체계를 기반으로 대학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고 학계의 건강한 경쟁을 유도하여 교육과 연구의 질을 높이기 위함일 것이다. 대학을 평가하고 결과를 발표하는 언론도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미래 지향적 평가체계를 제시하지 못하면 평가를 접어야 한다. 대학들이 추구하는 자율적인 특성화에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권력화된 각종 교육프로그램 인증제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뛰면 1등은 한 명이지만 360도 모두 다른 방향으로 뛰면 360명이 1등을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 많은 1등을 키워 내는 대학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2018년 일본내시경학회에 참석하여 만난 한 선생님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업가 중심의) 위대장내시경학회에서 강의하신 선생님은 (대학병원 중심의)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에서 주최한 학술모임에서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IDEN에 강사로 내정되었으나 위대장내시경학회에서 강의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급히 강사가 교체된 사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학회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의학 발전을 통하여 국민의 건강한 삶에 기여)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년에 1천만건의 위내시경이 시행되는 우리나라에는 매우 많은 내시경 의사가 필요합니다. 그 중 일부는 소화기내과에서 전문적인 training을 받으신 분이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모든 분들을 껴안고 다함께 발전하는 방향을 논의하지 못할 망정, 두 학회가 각을 세워 싸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단지 경쟁 학회에서 강의했다는 이유로 강사 list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생각한 어이없는 방침인지 저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내시경은 소화기내과의 독점물도 아니고 특정 학회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진료과와 무관하게, 소속 학회와 무관하게 누구나 내시경을 배울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외과, 가정의학과 및 모든 진료과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함께 실력을 높여서 수준 높은 내시경 검사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의사가 됩시다."
[2018-6 한겨레] 한국 연구 논문만 양산, 우수 연구자 배출 성적은 바닥
[2026-6-23] 한 학생의 편지에 대한 답변
안녕하십니까.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연구를 직접 경험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것 같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연구라는 것도 일종의 사회현상이므로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Impact factor의 한계는 모두들 잘 알고 있지만 극복이 어렵습니다. 워낙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학문 분야별로 차이도 커서 이를 보정하는 여러 방법도 있습니다만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연구에 대하여 상을 줘야 하는가라는 이슈도 늘 고민입니다. 스스로의 성과에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이지 이에 대하여 1등, 2등을 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의사로서, 연구자로서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된 것을 축하하여 incentive에 연연하지 않고 환자를 생각하며, 호기심을 잃지 않는 과학자의 길을 밟기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2026-6-23] 연구자의 자긍심을 키워주어야 한다. 데이타 인프라.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고 싶지 않다.
© 일원내시경교실 바른내시경연구소 이준행. EndoTODAY Endoscopy Learning Center. Jun Haeng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