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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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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 의협신문] 병원은 호텔이나 백화점이 아닙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주말 새벽에 걸려온 전공의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운전해 간신히 병원에 도착해 분만을 맡았다. 분만실에 도착했을 때부터 보호자의 못마땅한 얼굴 표정이 보였으나 분만이 급한 상황이라 기색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다음날 전공의와 간호사들로부터 보호자의 폭언과 불평에 대해 알게 됐다. '담당주치의가 왜 이리 늦게 오느냐? 남자 전공의 선생님은 내진하지 말아라, 의사 늦게 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 서비스가 왜 이것밖에 안되냐' 하면서 삿대질과 큰소리로 분만실을 공포분위기로 몰고 갔다는 내용이다.

일주일 뒤 외래로 온 산모에게 들은 내용인 즉, 첫아이를 미국에서 분만했고 그 때 분만과 입원비로 1500만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이 비용에 비해 서비스가 안 좋아서 그랬을 것이라는 변명을 한다. 도대체 병원에서 어떤 서비스를 기대했느냐, 분만 비용은 얼마를 지불했나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대답인 즉, 자신들이 입원할 때부터 주치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간호사가 자신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대로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원비는 30여 만원을 지불했는데, 자신들도 너무나 저렴한 비용에 놀랐다는 대답을 한다. 그런데 필자를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의료진에게 한 폭언과 행동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태도였다.

한국의 분만 비용이 미국에 비해 매우 낮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을 테고, 새벽에 주치의가 나와 분만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을 터이고, 24시간 근무하는 응급실이 아닌 한 근무 외 시간에 급하게 진행되는 분만의 경우 당직의가 분만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외래에서 고지했음에도 모든 상황을 자신들이 원하는 서비스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병원에 와서 대형백화점, 호텔에서 받는 서비스를 똑같이 받기를 요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병원은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비용을 지불한 만큼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니랍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서비스를 원하면 의료인과 병원을 원하는 만큼 고용하고 사용할 비용을 지불해야 되는 것이 아닌지요?"라고 되묻고 싶다.


앞 집이 헐리고 있습니다. 아파트가 싫어 다세대로 이사온지 5년. 작고 예쁜 정원을 가진 앞집이 있어 행복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4층짜리 다세대 건물이 들어서겠지요. 이제 이 골목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답이 없습니다.


[2015-12-6] 산책 중 근사한 석양을 찍었습니다. Facebook 친구께서 같은 시각 또 다른 각도에서 사진을 남겼습니다.

촬영 이준행

촬영 김욱성


[2015-12-6] 명의가 오히려 당신의 건강을 해친다

중증 환자의 치료에서 명의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명의의 역할은 11명의 협동 작업인 축구에서 한 명의 스타 플레이어가 차지하는 역할보다 훨씬 못한 것 같습니다. 현대 의료, 특히 급성 중증질환자의 치료에는 시스템 접근이 중요합니다.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기보다는 팀 플레이의 결과가 좋기 때문이지요. 명의도 명의 나름입니다. 팀플레이어에 능한 명의는 분명 팀의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독불장군격인 스타 플레이어는 없는 편이 낫습니다. 너무 유명한 의사 중 팀 플레이에 능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기사를 보니 미국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환자도 할 일이 있다. 의사가 X선·유전자검사나 수술을 해보자고 제안하면 바로 응하지 말고 네 가지 질문부터 던져보라. 우선 “그런 치료를 하면 얼마나 차도를 볼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둘째, “치료를 한 뒤 실질적 효과가 뭐냐”는 질문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치료의 결과 수명이 연장되는지, 심장발작 같은 위험이 줄어드는지 같은 물음을 던지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치료의 부작용 가능성은 얼마나 되느냐”다. 마지막은 “치료받을 장소가 대학병원이냐, 일반병원이냐”는 질문이다. 앞서 말했듯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병원에서 환자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

이런 네 가지 질문을 던지면 의사들은 불편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의 위험과 혜택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줄 의무가 있다. 그러면 환자는 자신의 결정에 좀 더 확신을 갖게 되며 상태도 호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 만약 어머니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면 최고로 유명한 심장전문의를 찾는 대신 위의 네 개 질문을 담당 의사에게 던져보자.


[2015-12-10.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소식 66호]

제가 소속된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이 'THE 세계대학평가' 의학분야 세계 88등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학장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이경수 학장은 "어떤 대학에서는 교수들에게 논문을 강요하기 때문에 교수들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하는 측면이 있다"며 "이렇게 교수를 압박하면 결국 전공의에게로 전가되는데 누가 수련지원을 하겠냐"고 지적했다. 우리 의대의 경우 압박이 아닌 교수들의 자율적 논문 투고가 이번 같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것이 학장의 입장이다.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논문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교수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둘러보면 '아랫 사람들에게 논문쓰라고 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교수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경수 학장님의 말씀은 '아랫사람 시키지 말고 직접 쓰라'는 의미일까요? '압박'이 아니라 '자율'임을 강조한 것일까요? 논문 때문에 전공의에게 일을 시키면 학장님께 혼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하고 논문쓰겠다고 찾아오는 전공의에게만 일을 시켜야 하는 시대가 되가고 있습니다. 조금 슬퍼집니다.

'1년에 논문 하나는 직접 쓰자'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2015-12-18 SMC 파트너즈센터 소식지] 삼성서울병원 위암팀. 세계 최고 수준의 조기위암 내시경치료 성적 발표


[2015-12-14. 경향신문] 저커버그 기부의 불편함

"사회의 결실을 승자가 다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사회를 수정할 필요성이 부자들의 기부에 주목한 나머지 묻히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기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회구성원이 그 결실을 비교적 골고루 가져가는 사회가 극소수의 부자가 기부로 생색내는 사회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국의 부자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 훨씬 이상의 결실을 독식하고 있다. 기부도 좋으나 그 이전에 재산을 어떤 식으로 벌고 늘렸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하에서 그것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부자들이 쉽사리 그들의 부를 천문학적으로 불리게 하는 시스템을 교정할 필요성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호들의 기부가 자칫 이런 문제를 호도할 수 있다."


[2015-12-19. 경향신문] 나는 없고 노동만 있는 직장을 떠나 삶과 노동의 주인 되는 나를 꿈꾸다

이렇게 시작하는 서평을 읽고 책(사표의 이유)을 살까말까 고민 중이다.

자본은 점점 거대해지는 반면에 개인은 극단적으로 왜소해지고 있다. 이제 대부분의 개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노동뿐이다. 먹고살기 위해 취직하는 것, 잘리지 않고 월급을 받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로 남았다. 이 책의 저자가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맞아 일상 전반을 노동이 지배하게 된 삶 속에서, 퇴근 후와 주말조차 노동을 위한 재생산의 연장”일 뿐이다. 즉, “생존의 필요 충족만을 위한 노동이 다른 모든 활동을 압도한 상태”라는 것이다.

저자는 스물여덟살의 젊은 사회학도다. 현실에 대한 그의 우울한 직시는 계속된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공간은 의미와 존중이 구현되는 현장이기보다 소진과 피로, 죽음과 모욕의 현장”에 가까우며 “개인들은 ‘저녁’도 없고 ‘나’도 없고 ‘관계’도 없는, 불행과 빈곤의 평등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이들은 ‘다른 삶’을 꿈꾼다. 이 책은 바로 그렇게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성탄절 아침 산책


과잉 의료 권하는 사회 - 너무 많은 약을 드시면서 위장장애를 호소하는 환자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못살던 시절에는 의가 衣였습니다. 근간에는 의가 醫입니다. 먹는 것, 자는 것 못지 않게 의료가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식주(醫食住)의 의(의료)와 식(먹는 문제)을 비교해봅니다.

돈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닙니다. 밥값은 충분히 싸야 합니다. 옳은 주장입니다. 밥값은 싸야합니다. 그런데 밥을 팔아야 하는 식당 주인은 고민입니다. 밥 가격이 원가에 미치지 못하므로 밥은 팔수록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원가 이하) 밥을 팔아서는 도무지 식당을 운영할 수 없습니다. 반찬을 비싸게 파는 것으로 손해를 보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손님이 반찬을 많이 먹으면 식당 운영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좀 더 맛있는 반찬을 개발하고 또 권하기도 합니다. 비싼 반찬을 먹는 손님들이 불평을 가지면 안되므로 반찬에 정성을 쏟게 됩니다. 반대급부로 밥에 신경 쓸 시간은 줄어듭니다.

반찬이 맛있다고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맛있는 반찬을 위하여 온 정성을 쏟다보니 막상 중요한 밥에 신경쓸 겨를이 없습니다. 점점 밥맛이 떨어져갑니다. 짜장면은 맛이 없고 탕수육은 맛있는 이유입니다. 짜장면을 팔면 짜장면 집은 망합니다. 탕수육을 팔지 않으면 짜장면 집은 망합니다.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만 먹으면 주인 아저씨가 눈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에서 밥과 같이 꼭 필요한 의료는 원가 이하입니다. 병원이 식당이라면 밥(필수 의료)을 팔아서는 기관을 운영할 수 없습니다. 반찬(비필수 의료)을 팔아야만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필수 의료의 범위는 정해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로 정해야 합니다.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필수 의료는 일종의 과잉 의료이므로 그 범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적당한 것은 정할 수 있지만 과잉의 범위는 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워낙 오랫동안 필수의료가 원가 이하로 책정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비필수의료가 일상의료의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환자나 의사나 어느 누구도 어디까지가 필수이고 어디까지가 비필수인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필수'에 대한 고민이 없다보니 일상의료가 조금씩 조금씩 넓어지는 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이유를 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점차 비필수의료를 권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의사가 '필수' 영역만 권하면 불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환자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더욱 암답합니다. 배가 아파 병원을 찾으면 검사와 투약이 이루어집니다. 진찰 부분은 매우 간단히 넘어갑니다. 환자의 증세를 잘 들어보고 자세한 신체 검진을 하는 것이 모든 진단의 출발점입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한 '필수' 영역입니다. 그런데 진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에 대해서는 거의 의료비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꼭 필요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검사와 투약에만 급여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늘 약을 먹게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병원방문 = 투약'이 공식처럼 되어서 이제는 많은 환자들이 병원에서 약을 주지 않으면 아무 치료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담과 진찰과 설명은 '필수' 의료행위입니다. 그런데 상담과 진찰과 설명만 하면 아무 것도 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결과 투약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병원에 가면 늘 약을 받게 되는 이유입니다.

한 환자가 여러 질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의사는 그 환자의 여러 질병을 두루 살펴서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나누고 최소한의 약으로 적절히 관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급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혈압에 대한 검사와 투약, 당뇨병에 대한 검사와 투약, 협심증에 대한 검사와 투약, 변비에 대한 검사와 투약, 두통에 대한 검사와 투약 각각에 대해서는 의료비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료비가 없습니다. 환자들이 각 질병에 대하여 따로따로 처방받다보니 하루에 수십개의 약을 먹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약은 화학약품입니다. 어떤 약제든지 보통 10%의 부작용이 있습니다. 10개의 약을 먹으면 산술적으로 100%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20개의 약을 먹으면 산술적으로 200%의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20개의 약을 먹으면서 위장장애가 발생하지 않으면 거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과, 저 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20개의 약을 먹는 분이 소화기내과에 오셔서 위장장애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위장장애에 대한 약을 달라고 하십니다. 20가지 약을 먹고 있는데, 약 때문에 위장장애가 생긴 것 같은데 약을 더 달라고 하다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어느 누군가 이 환자를 책임지고 돌봐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를 어떻게 소화기내과 의사가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환자를 '고혈압+당뇨병+협심증+변비+두통'으로 대하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하면서 균형된 관리를 해 주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 환자의 여러 질환을 균형되게 관리하는 것은 의료의 '필수' 영역입니다. 약을 주는 것만이 필수가 아니고 약을 주지 않는 것도 필수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공공의료가 전무하다시피한 대한민국에서 '필수 의료'는 '공짜 의료'가 되고, 의료기관은 '비필수 의료'에 의존하여 운영되면서 '과잉 의료'는 '보통 의료'가 되었습니다. 과잉 의료를 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디까지가 필수이고 어디부터 비필수인지를 구분하고, 필수 영역에 대하여 적절히 급여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과잉 의료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짜장면 집은 짜장면을 팔아서 운영되어야 합니다. 짜장면집에서 짜장면을 팔면 망하는 구조라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시급한 개선이 필요합니다.

수십년간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필수 의료'는 여전히 '공짜 의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나 환자 모두 과잉 의료를 피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노력해야 합니다. 의사나 환자 모두 과잉 의료를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엄청 노력해야 합니다.

의료를 너무 돈과 연관지어 설명했다고 탓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의료는 숭고한 것입니다. 비용과 무관하게 꼭 필요한 의료는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짜 의료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드리는 것은 숭고한 일입니다. 그러나 공짜 밥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현명한 정책 결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의료가 '필수 의료' 중심으로 바뀌는 정책 변환이 필요합니다. 그전까지는 과잉 의료를 피하기 위한 적절한 자제가 필요합니다. 약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동네 산책하며 감나무를 앵글에 잡아보았습니다.

한 달 전과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추위에도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 영 대견스럽습니다. 한 달 전 사진입니다.


올 한 해는 ㅁㄹㅅ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청소반장은 딱 3주 했지만 여파는 1년 내내 지속됩니다. 연차 휴가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7월 휴가 계획을 망쳤더니 그 이후로는 도무지 어디 놀러 갈 엄두가 나질 않더군요. 남은 연차가 너무 많아서 별 생각 없이 월화수목 4일 휴가를 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신정 연휴 포함하여 무려 10일 휴가가 되었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계획이 하나도 없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사진만 찍습니다. 불쌍한 카메라 셔터만 눌러댑니다. 착칵, 착칵, 착칵...

친구가 페북에 코멘트를 주어서 답을 보냅니다... "너마저 새벽잠이 많이 줄었구나. 하루 종일 찰칵, 찰칵 할 수는 없는지라 밀렸던 책(한복입은 남자, 행복은 전염된다)도 보고, 이런 저런 전시회도 가고, 사 놓고 듣지 못했던 에밀 길레스의 베토벤도 듣고... 나름 할 일은 많다. 아직 고3 아빠 역할이 끝나지 않아 집에서 유배중일 뿐. 내일은 병원에 나가 내시경도 해야 할 듯. 아는 형이 위암 진단 받았다고 찾아와서... 여하튼 고마우이"


[2015-12-29] 한 애독자로부터 책을 선물받았습니다. 제목은 <콜럼버스의 교환>. 서울대 황상익 교수의 역작입니다. 긴긴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 중이었는데 좋은 해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책과 함께 연말연시를...


[2015-12-29] 연말 병원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올해의 사진으로 뽑아봅니다.


[2015-12-30.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40) 시리즈를 마치며

지난 1년 동안 연세대학교 김호기 교수와 서울대학교 박태균 교수가 경향신문에 연재한 '논쟁으로 읽는 70년'이 끝났습니다. 다양한 이슈에 대하여 되돌아 볼 기회였는데 벌써 끝나다니 퍽 아쉽습니다. '시리즈를 마치며'라는 글에서 김호기 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학술과 담론 논쟁의 절정기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였다. 산업화의 목표, 민주화의 방향, 우리 사회에 강제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등에 대해 지식인들은 활기차게 논쟁을 벌였다. 그만큼 당시 한국사회와 지식사회는 살아 있었다. 어떤 논쟁이든 새로운 문제제기에 대한 도전과 사회발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이러한 논쟁의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이 강화됨에 따라 사회 전체가 활기를 잃어 왔고, 불투명한 미래와 모호한 전망이라는 지적 비관주의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지식사회를 짓누르고 있다는 게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논쟁이 시들해진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다. 대학의 세계화가 강화되면서 적지 않은 논문들이 영어 등으로 쓰여 독자가 줄어들었고, 지식사회의 전문성이 증가해 시민사회와의 소통이 약화됐다는 게 또 다른 요인들이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다함께 발전하는 지식사회는 없어지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나간 논문이 몇 개면 만사 끝인 상황에서 누가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문제를 고민하겠습니까? 영어 논문은 '양날의 칼'입니다. 공정한 시각에서 우리 학문의 오류를 바로잡는 순기능도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서양 편집자들에게 필요한 주제를 연구하게 된다는 역기능도 있습니다. 게다가 영어 논문은 화두가 되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Inner circle 몇 명만 읽는 논문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겠습니까? 김호기 교수께서 영어로 씌인 논문은 논쟁으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 논문을 씁시다. 영어 논문을 쓰되 우리말 논문도 함께 씁시다.


하루 종일 이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2016 새해 첫날 애독자 여러분께 장미꽃 한송이를 보냅니다. 사랑합니다.


한해 참 많이 참았다. 그런데 더 참으라는 운세다. 계속 참자


[이런 저런 링크]

미군장교가 찍은 1952년 한국의 모습

© 일원내시경교실 바른내시경연구소 이준행. EndoTODAY Endoscopy Learning Center. Lee Jun Hae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