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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독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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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미래 클리브랜드 클리닉 - 토비 코스그로브 지음]

차례만 봐도 더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 있습니다. 차례를 옮깁니다.

  1. 그룹 프랙티스가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한다.
  2. 팀 진료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3. 의료는 질 관리를 위해 모니터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4. 21세기 의료는 혁신적이어야 한다.
  5. 의료는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경험이어야 한다.
  6. 건강은 치료가 아니라 건강관리에 달려 있다.
  7. 가치와 편의를 위한 다양한 셋팅이 필요하다.
  8. 의료는 맞춤형이어야 한다.

미국 의료의 경험을 쓴 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못 읽힐 가능성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룹 프랙티스'나 '맞춤형 진료'가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그럴싸한데 비용이 천문학적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현실이나 문화에 맞지 않습니다. 저비용 표준진료를 잘 하는 것이 우리나라 의료의 당면과제입니다. 이를 무시하고 맞춤형 운운하면 배가 산으로 가게 됩니다.

몇 페이지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더 읽으면 헛소리(말은 환자 중심이라고 되어 있으나 내용은 의사 중심인 의료서비스)에 중독될 것 같아서...


[2014-12-7. 경향신문]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
리가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일뿐이다

이제 불의 열차는 지나갔다 너는
지나갔다 고요하다

두 줄의 레일이 지평선 끝에 맞붙어
있고

항공 봉투 하나
침묵의 침묵 위에 떨어져
반짝인다

안녕
잘 가세요

PAR AVION

- 박남철(1953~2014)


[2014-12-20] 독일의 에른스트 푀펠과 베아트리체 바그너가 지은 "노력 중독"을 읽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에 관한 고찰"이라는 거창한 부제가 붙어 있군요. Chapter 제목은 이렇습니다. 지식 중독, 속도 중독, 편견, 친구 중독, 완벽에의 강박, 전문성에 대한 맹신, 독서 중독, 인간. 이 중에서 전문성에 대한 맹신에 나온 한 부분을 그대로 옮깁니다. 필요하고 중요한 연구라고 좋은 저널에 실리고 인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위 코드가 맞는 연구만 실린다는 것이지요.

지식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란 없다.

출판물의 범람이 얼마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지는 내 연구 경험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두뇌 연구 분야의 경우 매년 10만 건 가량의 학술물이 출간된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든 관련 자료를 읽어내고 다른 학자들의 학문적 성취를 인지하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아주 부지런하다면 한 해에 100여편의 학술논문은 읽을 수 있을 것이고, 1000여 건의 논문을 대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겨우 1 퍼센트 정도밖에 읽을 수 없으며, 대부분은 그나마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놓친 99퍼센터의 학술자료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읽지 못하고 내팽개쳐 둔 논문 더미 속에 정말로 중요한 지식이 숨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일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중요한 연구 작업을 합의한 연구자들의 자체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한다. 마치 쭉정이들 사이에서 밀알을 가려내듯 자연스럽게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쳐 필요한 학술자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뛰어난 학술자료를 누군가가 읽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점점 더 알려지고 이에 반해 질 나쁜 학술작업은 스스로 도태되는 식이다. 하지만 이때도 두뇌의 한게가 작용한다. 이 책에서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우리의 두뇌가 항상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것도 개입된다는 말이다.

목표는 언제나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학자의 목표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를 심화시키고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는 고매한 이상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작업의 중요성을 인정받거나 적어도 존재 여부를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이는 개인적 목표다. 게다가 자신이 속한 학술단체나 공동체의 입장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인용의 카르텔이 형성되기도 한다. 즉 당신이 나를 인용해주면 나도 내 책에 당신의 연구를 인용해주겠다는 일종의 상호 묵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학자들은 멀리하고 자기들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종의 폐쇄적인 학술공동체가 생겨난다. 이러한 카르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불행히도 인용되지 못하고 학술자료의 홍수 속에서 쓸쓸히 사라져간다.

정치적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면 이러한 학술계의 인용 카르텔은 외부인의 눈에는 전혀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연구자들에게 연구 결과의 질이나 내용보다 인맥이 더 중요하다는 그릇된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연구자들의 작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성질 괴팍한 학자의 연구는 중요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무시되고 잊힐 수도 있다. 결국 이는 학문의 세계에서도 자신을 팔아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연구 능력은 기껏해야 평균 이하이면서도 가장 목청 높여 대중을 모으고 최상의 마케팅 전략으로 적합한 인맥을 찾아 아부하는 사람이 종종 가장 중요한 학자인 양 행세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고문 역할을 맡은 전문가를 보면 그렇다. 그런 종류의 어리석음이 정치적 결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다. 그에 맞는 예들은 다음과 같다.

이 책 곳곳에 흥미로운 성찰이 넘칩니다. 일부를 옮깁니다.

(44쪽)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없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의대를 졸업하는 반면, 헌신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의대에 입학조차 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은 구조적 어리석음의 한 예다. 객관적 기준을 마련해 그에 합당한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의학을 공부하도록 한 것은 아주 불공정한 시스템이다.

(71쪽) 극도의 무기력 상태를 경험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복잡함을 줄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몇 개만 골라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멈춤의 시간을 가져야 가능하다. 내가 오를 산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더라도 우선 자리에 앉아 가야 할 길을 몇 단계로 나눈 다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도 일할 때 적어도 10-15분 정도는 쉬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복잡함을 줄인다는 것은 죄의식이나 혹은 감정적 부담 때문에 억지로 맡은 일들을 취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2쪽) 현대 문명의 가장 커다란 어리석음은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망각한 데서 비록됐다.

(211쪽) 인위적인 통제가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몸에 각인된 지식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218쪽) 대규모 프로젝트는 각 분야별 전문가의 수적 부족이나 결함이 문제가 아니라 지도력을 발휘할 프로젝트 책임자의 자질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책임자는 한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라기보다는 개별 사안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서로 통합하며 연결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지녀야 한다.

(270쪽) 명백한 과학적 발견일지라도 언어로 전환될 경우 처음의 명료함을 잃거나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외국어로 텍스트를 써야 하는 경우 표현의 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시작부터 다루고자 하는 정신세계가 한정되거나 한 방향으로 쏠리기도 한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적 '주류'에 편입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295쪽) 농담은 감추어진 진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특징이 있다.


[2014-12-27. 경향신문] "희망이 없다, 고로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일본의 젊은 ‘사토리세대’

묘한 책에 대한 묘한 서평을 보았습니다. 당장 읽고 싶어집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넌 도대체 뭐가 되려고 이 모양이냐?" 답이 없습니다. 왜냐구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그만이지요. 이것이 세대차 아닐까요? 아무래도 이런 현상에 대한 분석 같습니다. 당장 서점으로 달려갑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이언숙 옮김·오찬호 해제. 민음사. 386쪽. 1만9500원

2011년 일본 내각부는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해 발표했다. 그 결과가 이채롭다. 20대 남성의 65.9%, 20대 여성의 75.2%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20대의 약 70%가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다는 뜻이다. 이 조사 결과는 NHK방송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일본인의 의식 조사’에서 나온 통계와도 거의 일치한다.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설문에 ‘만족한다’고 답한 젊은이는 1973년에 비해 두배로 늘었다. 이처럼 요즘 일본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젊은 층이 매우 활기찼던 1970년대, 신인류가 활보했던 1980년대, 거품경제가 붕괴했던 1990년대의 젊은이들보다 행복지수가 오히려 높다.

이 조사 결과는 일본 지식인들과 미디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졌다. 그때부터 젊은 세대에 대한 동정과 걱정의 여론이 들끓었다. ‘격차사회’ ‘비정규직 고용의 증대’ ‘히키코모리’ ‘피시방 난민’ 같은 비관적 용어들이 일본 젊은이들의 삶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통용됐다. 그것은 마치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88만원 세대’ ‘이태백’ ‘삼포세대’ 같은 용어들이 유행하는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일본 젊은이들의 답변은 기성세대의 고정관념과 달랐다. 취업난과 부조리한 사회구조, 워킹 푸어 등의 기사를 쏟아내며 젊은이들의 불행과 고난을 외쳐대던 매스컴이 뜨악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왜 일본 젊은이들은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저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그 “당연한 결과”에 대해 “(일본의 젊은이들은) 지금은 비록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저자는 올해 29세의 젊은 사회학자다. 도쿄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하며 게이오기주쿠대학 방문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3년 전 이 책을 썼으니 그때는 스물 여섯 살이었다. 젊은이의 시각으로 같은 세대의 삶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은 “강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킬 참신한 젊은이 연구”(아사히 신문)라는 평가를 받으며 일본에서 출간 2년 만에 15만부가 팔렸다.

책에서 설명하는 ‘행복한 젊은이들’은 지난해부터 일본에서 유행하는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사토리’는 도를 깨쳤다는 의미인 ‘득도’(得道)의 일본식 발음이다.

저자는 “자기충족적이라는 의미, ‘지금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이라는 맥락에서 ‘컨서머토리(consummatory, 완료된)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는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기묘한 안정감”이 뒤틀린 사회 구조로부터 나왔으며, 기성세대가 지속적으로 엉뚱한 곳에 투표함으로써 그 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관점을 피력한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반어적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해제를 쓴 한국의 사회학자 오찬호는 “사회적 불평등이 개선된다는 징표가 사라진 시대에 어울리는 참으로 솔직한 마무리”라고 평한다.


내년 3월 헬리코박터학회 준비차 제주 현장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숙소에서 Noblian이라는 잡지를 보았습니다. 과소비를 권하는 현란한 광고와 저급한 잡글로 가득 찬 그야말로 잡지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다른 길]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글쓴이는 [내가 사랑하는 유럽 Top 10]의 정여울. Noblian과 박노해. 묘한 대조입니다.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게 아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 박노해 -

저 역시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입니다. 가자! 저 푸른 초원으로...


[어떤 답변] 박노해 시인의 글 중 "경주마가 할 일이 트랙임을 알아차리고 푸른 초원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 이미 오래 전부터 "경주마가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일찌감치 푸른 초원에서 쉽게 돈벌 궁리만 하면서 살고 있으니 글로 굳이 더 불붙이실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제가 최근에 겪은 일을 나열합니다.

1. Marry Christmas라고 적힌 카드를 받았습니다.

2. 10년 전부터 "Endoscopic conference"를 "Endoscopy conference"로 바꾸라고 했건만 어제 준비된 슬라이드 첫 장은 "Endoscopic conference"였습니다.

3. Minor revision으로 원저 심사통보를 받았기에 주저자인 작년 전임의 (현 개원의)에게 알렸더니, 개원가에서 근무하면서 논문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정말로 죄송하지만 투고를 안 하겠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안 하셔도 "다들 이미 알아서 편하게 살고 있으며, 경주마가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트랙 따위는 안중에도 없은지 한참 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권리만 주장하도록 만든 시스템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2014-12-29. 경향신문] 강한 말의 상투성

... 흔히 말은 ‘생각의 그릇’이라고 하는데 말이 이렇다 보니 그 안에 도통 생각이란 것이 담겨 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저 하도록 되어 있는 특정 코드의 말을 자동적으로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당연히 상투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게 말해도 그건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정형화된 관행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겠다.

... 그런 의견집단들의 빠르고 확실한 반응에 의존해 불성실하게 글쓰고 무책임하게 편집해 온 언론종사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고 앞으로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고 하겠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소란스럽기만 한 '비창조적 흥분' 대신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의 가치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중시되었으면 한다.

© 일원내시경교실 바른내시경연구소 이준행. EndoTODAY Endoscopy Learning Center. Lee Jun Hae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