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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Random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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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A 연수 교육 - 환자를 위한 진료실 가이드라인, 설명의무


새봄 맞이 one point lesson

내시경을 새로 시작하는 분들이 많은 시즌입니다. 4-6월 사이에 몇 번의 one point lesson을 마련하겠습니다. 그 첫 자리는 4월 17일입니다. 2주 사이에 아주 많은 질문 거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전공의 및 임상강사 여러분의 많은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일시: 2018/4/17 (화) 19:00 - 21:00

장소: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1층 내시경실 회의실

아래 2017년 강의 동영상을 미리 보고 오십시오. 저는 바뀐 것 중심으로 짧은 강의를 준비하겠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전공의 및 임상강사 여러분의 질문에 대한 토론을 하겠습니다. 3월부터 4월 초까지 내시경 도중 조금이라도 궁금한 점이 있었던 증례 ID를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예습용 동영상

[프로그램]


2018-4-3. 여고생들과 인터넷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질문 주어서 고맙습니다. 짧게 답합니다.

1. 의사가 되어서 할 수 있는 의료 봉사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요?

첫 질문이 봉사에 대한 내용이라 반갑습니다. 우리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 정신이므로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봉사는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할 수 있지만, 의사가 되면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원래부터 아픈 사람을 돌보는 직업이니까요.

(1) 온전히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을 직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Full time으로 국경없는 의사회 등에서 일하는 방법, 자선 병원에 취직하는 방법 등입니다. (2) 주중에는 진료를 하고 주말에 봉사활동을 하는 의사들도 많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의료 취약 계층, 고아원, 양로원 등을 개인 자격으로 혹은 봉사 단체에 참여하여 어려운 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3) 의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재능기부, 교육봉사 등도 좋은 일입니다. (4) 따로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진료하면서 환자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친절한 말 한마디 해드리는 것도 크게 보면 봉사 아닐까요?

저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배운 점을 잘 정리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다른 의사들이 자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것도 말하자면 간접적인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능기부 같은 것으로 봐 주면 좋겠습니다.

2.의사가 되고 싶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아버지가 소아과 의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의 꿈을 가지게 된 경우입니다. 의사로서 택할 수 있는 전문 과목이 많은데 저는 내과 중에서도 내시경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사진을 찍고, 기계를 다루는 취미와 연결되는 편입니다. 다양한 전문 분야가 있으니 자신의 취향에 맞게 정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의사로서 환자를 보지 않는 의사도 많습니다. 학교나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거나 공무원이 되어 정부 정책 결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3. 사람을 치료하는 것과 동물을 치료하는 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기 결정권이 가장 큰 차이 같습니다. 물론 소아 청소년의 경우는 부모가 대신 결정하기도 합니다. 동물은 의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상황을 잘 보고 가장 적절히 선택해서 치료하는 수 밖에 없겠지요.

4. 의대에 다니실 때와 의사가 되고나서 힘들었던 점과 뜻깊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의학 지식은 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의대 다닐 때에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많지만, 의사가 되고 난 후에도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논문도 읽고, 세미나에도 참석해야 하는 등 한 마디로 계속 공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중증 환자를 치료하다보면 의사가 육체적으로 피곤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아픈 분을 생각하면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지요.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잘 돌봐드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루 하루가 봉사인 셈입니다.

5.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까요?

의사는 머리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치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Sympathy 같은 것이지요. 진심으로 환자를 아끼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 사회 경험과 폭 넓은 대인관계가 필요합니다. 생각을 자극하는 좋은 책을 가끔 읽으면 좋습니다.

6. 진료를 하면서 제일 당황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선의 노력을 다 했는데도 결과가 나쁜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가 모든 병을 완쾌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당황하기보다는 환자와 그 가족들과 어려움을 함께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7. 이 외에 저희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하느라 힘들겠지만 체력 단련도 잊지 마세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드는 법입니다. 가끔 운동이나 산책을 하세요.

여러분. 힘내세요.


이대 목동 병원 의료진 구속 사태를 생각하며

어려운 환경에서 환자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더라도 그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무리한 진료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소 속도를 줄여 안전에 더욱 신경쓰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한 세션에 ESD를 3명 하면 거의 쓰러질 상황이 됩니다. 구역질이 납니다. 그래도 참고 했습니다. 기다리는 환자의 마음을 생각하여 참고 또 참았습니다. 무리하고 또 무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역질을 참아가면서까지 힘들게 시술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하여...

XXX 간호사님
하루 3명 ESD를 해 보겠다는 어제의 말씀을 취소합니다.
위험을 감수한 진료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두렵습니다.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치료를 서두르면 위험성이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가장 안전하게 진료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환자 안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2018-4-4. 이준행 드림


[2018-4-13] Facebook에서 권복규라는 분을 follow 하기 시작하였다. 아래는 권복규씨의 posting 중 하나.

조선 성리학자의 후예인 위선적 도덕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는 그런 생각들이 의료윤리의 바른 실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의료윤리를 의사에게 교육하는 이유는 성인군자 박애주의자 의사가 되라는 게 아니라 "좋은 의료(good practice)"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 병원 조수진 교수는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병원에 출근했다. 적어도 1년 이상 휴직하고 푹 쉴 수도 있었다. 이번 일로 구치소에 가지만 않았다면 "살신성인"하는 의사로 칭송받을 것이다. 평소에도 책임감 강하고 참 마음이 고운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의료윤리는 의사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환자 보지 말라는 거다. 이건 좋은 진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며 선진국 의사라면 누구나 그렇게 한다. 헬조선에서만 의료인들에게 목숨 걸기를 요구한다. 의사가 번아웃되면 환자가 위험해진다.

위선적 도덕주의자들은 그러면서 아무도 읽어본 적이 없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완전한 역사 왜곡인 허준, 그리고 왜 아프리카는 갔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슈바이처는 들먹거린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사의 품위와 동료애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앞에서 맹세하는 서약이다. 어디에도 "공짜로 의술을 베풀고..."이와 같은 구절은 전혀 없다. 능력이 모자라면, 혹은 상황이 안 되면 치료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는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말아라"라는 구절만 있다. 비록 사망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설 동의보감의 허준은 완전한 역사왜곡이다. 유의태는 허준보다 후대의 사람이며 허준은 의과를 치른 적도 없고 당시 고위층 집에 드나들며 잘 보여서 무시험으로 채용된 사람이다. 서민 진료 같은 건 아예 하지도 않았고 동의보감은 잘 만든 족보책이긴 하지만 그 책을 다 쓴 것도 아니다. 전의감과 내의원 의관들이 함께 편집했고 그 대표 편집자였다. 인도주의나 박애주의? 같은 건 알지도 못했던, 처세와 눈치에 능했던 사람이다.

슈바이처는 원래 신학을 했고 신학교 교수였다. 학위논문이 예수의 실존 여부에 대한 것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성서 본문 비평 등의 방법을 시도하다보니 역사적 실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서양의 윤리적 전통을 섭렵하다보니 이게 다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슈바이처의 저서 <문화와 윤리>가 그 내용이다. 비슷한 시기에 슈펭글러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절망에 빠진 그가 택한 게 의술의 길...모든 이론은 잿빛이며 오로지 실천만이 나를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여 의사가 되어 "생명의 원천" 아프리카로 갔다. 그의 "생명에의 경외"사상은 사실 모든 철학과 이론은 무의미하다는 절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그도 흑인을 열등하다고 본 백인우월주의자였으며, 급격히 발전하는 의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위선적 도덕주의자들은 초등 윤리 사고에 입각하여 "사람이 살고 봐야죠", "사람이 우선이죠",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죠", "돈보다 생명이죠" 등의 말은 참 잘도 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생명을 위해 어떤 시스템을 만들고 얼마만큼의 비용을 투자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의료는 있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은 그냥 무시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 의료인에게 떠넘기고 의료인들이 히포크라테스, 허준, 슈바이처가 아니라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초등스러운 결론을 낸다. 그리고 대책은 "의료인 윤리교육"이거나 "의료인 특권 폐지"이다. 이제는 "의료인 구속"까지 추가되었지.

매사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최저임금 올려 실업률 역대 최고로 만들어 놓았고, 기업을 때려 기업하기 최악인 나라를 만들어 놓았고, 입시제도를 건드려 "누구나 한가지만 잘 하면 대학가는 나라"가 아닌 "할아버지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으로 대학가는 나라를 만들어 놓았다.

당신네들 마음이 나쁜 건 아니다....그러나 머리가 나쁜 걸 어떻게 하겠니...그렇게 알흠다운 마음으로만 살아가면 결국 이 세상은 위선적 도둑고양이들만 판을 치게 된단다. 위선적 도둑고양이들과 도둑 돼지들을 상전으로 위에 모시고 "사람 사는 세상" 잘 살아보렴.


어느 페친이 날카롭게 지적했는데 나는 정치적으로 우파 스탠스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근본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다. 내가 찬성하지 못하는 건 "내가 원하는 교육을 내가 원하는 학교에서 아무 때나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교육", 또는 "내가 원하는 의료를 내가 원하는 병원이나 의사에게 아무 때나 공짜로 받을 수 있는 의료"이다.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마치 그렇게 해 줄 것 같이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들이 혐오스러운 것이다.

무상의료 하려면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종류와 장소, 의사를 통제하지 않고는 실현시킬 길이 없다. 소위 "사회주의적 의료"하는 어느 나라든 그렇게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어려운 길을 갈 수 없으니 거의 대부분 민간인인 의사와 의료기관을 강제로 징발하는 쉬운 길을 갔다. 수가를 원가 이하로 제한하니 나머지는 이 의노들이 미친듯이 움직여서 메꾸는 길밖에 없었다. 또한 의료 특유의 이타주의도 큰 몫을 했다. 뻔히 손해인지 알면서도 바로 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는 걸 권력과 정치인들은 최대한 이용해 먹은 것이다.

무상의료 하려면 설득을 하라는 것이다. 건강보험료 부담은 더 오르고, 서비스는 제한되며, 아무나 빅5병원 갈 수 없다. 돈으로 제한할 수 없다면 인위적으로라도 제한할 수밖에 없다. 극심한 중증환자 말고는 빅5병원에 입원할 수 없도록 어디 한번 그렇게 해 봐라. 필경 정권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걸 설득하지 않는 모든 짓거리는 결국은 사기라는 것이다.

한국 진보는 민족주의자부터 포스트 맑시스트에 페미니스트, 환경론자, 인문애호가 등 온갖 무리들이 다 섞여 있다.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 매번 헛발질만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걸 실현시킬 정책 시스템과 관료 시스템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의약분업, 의전원, 로스쿨 제도, 황우석 사건, 광우병 소란, 대입제도의 혼란...내가 몸소 겪은 것만 해도 한두개가 아니다. 모두 진보나 개혁에 대한 견고한 철학의 부재, 그리고 엉터리 같은 정책과 관료 시스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언론 등이 합작한 결과였다.

내가 몸소 겪은 가장 분명한 "진보적" 이자 서민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사실 박정희에 의한 의료보험 도입과 전두환에 의한 확대, 그리고 전두환에 의한 중고생 과외금지 정책이었다. (건강보험 제도에 대해서는 물론 수많은 비판거리가 있지만 적어도 서민 노동자들이 병원에 갈 수 있게끔 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의료기관은 비급여 항목과 약품 판매 수익 등으로 그럭저럭 적자를 메꾸었는데 의약분업은 그마저도 빼앗아버린 것이다! 대체 누굴 위한 정책이었는지!!). 과외금지 정책은 물론 폭압적인 정책이었지만 그 덕분에 서민과 노동자의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걸 지금의 입시제도와 비교해 보라!

그런데 "진보개혁"세력의 작품은 무엇인가? 의약분업? 실패한 제도다. 대학입시? 이 혼란을 몸소 느껴보라. 과외 금지하고 내신+수능점수로 대학 가는 제도가 그나마 공정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의전원? DJ때 결정했지만 결국 원래대로 복귀했다. 로스쿨? 노무현 때 결정했지만 결국 수많은 혼선만을 빚고 있다. 산업이나 경제에 대해서는 뭐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잘했다는 얘기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없으면 내버려 두려고는 했다. 쓸데없이 들쑤셔서 개혁을 한다니 어쩌니 하진 않았다는 거다. 그들이 부패하고 돈을 먹고는 또 다른 문제다.(이제 보니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긴 하나...)

의전원 제도는 도입부터 원상복귀까지 개인적으로 함께 했다. 초대 의전원협의회 간사였으며, 마지막 문을 닫을 때 정부 위원회의 간사이기도 했다. 왜 우리나라에서 뭔가 "개혁"이 안 되는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로스쿨도...취지는 좋았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변호사 배출 정원을 산정한 다음 국립대에 나눠주어 로스쿨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수원처럼 등록금을 무료로 하고 다만 연수원에서 해야 할 교육을 전국 국립대가 특성에 따라 배분해서 하면 좋았다고 생각한다. 사립대는 그냥 법대를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국립 로스쿨에서 법대 졸업자, 혹은 법학 복수 전공자를 적절한 비율로 뽑아 법조실무를 가르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개혁"을 하겠다면 어중띠게 하지 말고 그 근본을 파서 근원적인 대책을 세워라. radical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뿌리를 뽑는다는 뜻 아닌가? "무상의료"가 본심이라면 공공의료기관 대폭 확충하고, 국민을 설득해라. "이제 더 이상 원하는 병원에서 원하는 의사에게 마음대로 진료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법이 정한 규칙을 지키세요,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세요!!"라고 말이지.

교육의 서열화가 문제라면 입시를 건드려 어떻게 할 생각 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바꿔봐라. 서울대를 대학원 연구중심대학으로 만든 후 학부생 뽑지 못하게 하고 국립대학을 풀 제로 운영한 다음, 국립대와 시립대 등록금을 무상으로 해 봐라. 그리고 사립대를 규제에서 풀어주면 가난한 우수한 학생 대부분은 국립대로 몰릴 거다.

부동산과 주거 안정이 문제라면 허물어가는 구도심이나 뉴타운 구역 주택들 정부가 매입한 다음 공영 개발해서 청년들에게 저렴하게 분양하거나 세를 줘 봐라. 헌법에 토지공개념이니 뭐니 애매한 거 쑤셔넣느니 지금 할 수 있는 제도와 예산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한번 해 봐라.

이 모든 게 쉽게, 근본을 손 안대고 코풀려 하니 생기는 어려움이다. 덧붙여 현장도 모르고 사람들의 정서도 모르는 자들이 끼리끼리 권력을 나눠먹다가 생기는 문제들이다. "자본"과 "기득권"에 대한 쓸데 없는 적개심과 이상한 민족주의 말고는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잡탕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신문 스크랩]

[최범의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10) 경제개발 수단으로 양적 발전…현실은 빈곤한 일상의 디자인


[교수 신문에서 어떤 교수님의 솔직한 글을 보고 옮깁니다]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내 자신이 미워졌다

이기홍 논설위원 / 강원대 사회학과

요즘의 학문후속 세대에게는 송구한 이야기이지만, 석사학위 논문만 쓰면 대학 교수로 초빙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은 국민적 지지를 겨냥한 조치 가운데 하나로 대학 정원을 두 배로 늘리고, 그것에 더하여 ‘졸업정원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제도로 다시 30%를 더 늘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권력이 하라면 하는 데에서는 대학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준비도 없으면서 적극적으로 가담해 돈벌이 기회로 삼았다. 내가 다녔던 학과는 시설이나 교수진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20명의 입학 정원을 52명으로 늘렸다.

대학들은 부랴부랴 교수들을 끌어 모았다. 물론 준비된 학자도 있었지만, 엉겁결에 석사 학위를 받고 급행으로 대학으로 달려간 학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立稻先賣’ 세대로 불렸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육개장’이라는 파격적인 특혜까지 받았다. 동년배들이 32개월 안팎의 기간을 군복무로 보낼 때, 석사 학위를 소지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그들은 ‘특수전문요원’으로 대접받으며 6개월간의 군대 체험만으로 장교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아들들을 위한 일시적인 제도로, 그들의 의사나 요구와 무관하게 ‘운 좋게’ 주어진 혜택인 만큼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동년배들이나 후배들에게 미안해해야 할 부채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 80년대는 광주의 선혈이 지식인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일깨운 시대였다. 이제 그들이 은퇴하고 있다.

나도 그 ‘입도선매’ 세대의 막차를 타고 대학 교수가 됐다. 그리고 ‘직업’ 교수로서 남 보기에 아주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왔고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교사로서, 지식인으로서 저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며 박완서 선생은 부끄러움을 가르쳤지만, 누구를 가르칠 주제가 못되는 나로서는 후배 교수들께 반면교사, 타산지석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을 말씀드린다.

그저 그런 연구자

사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부터 ‘운’이었다. 한해의 절반은 방학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에서도 절반은 휴교 등등으로 대학생활을 허송한 탓에 졸업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딱히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뒷날의 대학 팽창을 예비하기라도 하듯,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대학원 입학 정원이 늘어났고, 공부의 목표나 사명, 또 내 적성이나 능력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마침 대학원에 응시해 행운인지 불운인지 입학하게 됐다.

대학원 시절, 同學들은 종속자본주의니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니 하며 한국의 사회현실과 뜨겁게 씨름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서구에서 대처와 레이건을 앞세운 신보수주의가 득세하고 동구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좌절의 1980년대를 한국에서는 ‘질풍노도의 시대’로 만들 만큼 치열하게 공부하며 ‘학술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나는 과학이란 무엇인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현학으로 도피해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덜컥 교수가 된 것이다.

모름지기 연구자는 천직으로서 소명의식, 구도자적 겸허, 무한책임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한 大家는 설파한 일이 있는데, 나도 처음에는 단순히 서양 학자들의 주장을 모으고 얽어서 내 이야기처럼 내놓는 것이 아니라 ‘一家’를 이루겠노라는 야심찬 포부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전공하는 ‘사회과학철학’은 국내에 전문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과 토론을 통해 성장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학술지 편집자의 충동질을 못 이겨 몇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얻은 소득은 무지하고 당파적이라는 평판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양 학자들의 글을 주로 읽어야 했고 언어장벽 때문에 늘 뒤쫓아 가는 처지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무슨 새로운 착상을 하더라도 그것을 발표하고 서양 학자들과 경쟁하는 일은 꿈꿀 수 없었다.

결국 한국어로 한국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썼고, 전문연구자들이 희소하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려도 책잡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소소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식 수입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학문 후진국 연구자의 운명이라며 자위했다. 연구 성과를 묻는 질문에는 “대가는 나중에 저서로 말한다”는 은사의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근무하는 대학은 실적을 강조하면서 저서를 논문보다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논문을 ‘많이’ 발표하면 탁월한 연구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그 기준마저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것이어서, 한해에 그저 그런 논문 한편을 발표하는 데 급급하며 지내왔다.

엉터리 교사

교수는 무엇보다 ‘교사’이다. 우리 사회의 대학들 대부분이 자칭으로 내세우는 ‘연구중심 대학’이라는 것이 냉전체제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을 나는 근래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미국의 군부가 군비경쟁에 필요한 과학지식 개발을 위해 연구비를 제공하면서 대학과 교수들을 동원할 때,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진 대학의 경영자들이 그리고 그들을 통해 대학을 통제하려는 권력자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양보해서, 연구중심이라고 하더라도 대학은 연구소가 아니라 엄연히 학교이다. 학교의 일차적인 사명은 ‘교육’에 있고, 그러므로 교수는 일차적으로 교사이다.

그러나 운 좋게 교수가 된 나는, 하다못해 교육학 개론조차 공부해본 적이 없는 준비되지 않은 교사였다. 학문의 자유는 들어라도 봤지만 교사의 책무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작정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준비에 꾀가 생기면,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허울로 학생들에게 발표를 맡기고, 더러는 호연지기를 키운다는 핑계로 산이나 들로 데려가 육신의 양식으로 마음의 양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것은, 근래 ‘취업준비’를 강요하는 총장에 맞서 대학교육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떠드는 과정에서의 일이다.

그러니 내게 배운 학생들 가운데, 내 전공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학을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회학에 흥미도 느끼고 지식욕구도 생길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쳤다면, 아무리 지방대학이라고 하더라도, 30년 동안 대여섯의 후학을 배출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의 논문을 가로챘느니 대학원생의 인건비를 착복했느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떠돌지만, 공부하는 제자가 없으니, 내게 그런 일은 애당초 일어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싶은 대학원생이 학교를 떠날 때에도 나는 말리기는커녕 등을 떠밀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사회학 공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대로 된 교사라면, 사회학 공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그를 훈련시키고, 또 사회학 공부를 하는 사람도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세상을 고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군자의 세 번째의 즐거움으로 꼽은 선현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엉터리 교사의 자업자득이다.

여우의 신포도

교수로서 나는 어쩌면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총장이 보직을 맡아달라면,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는 상투적인 인사치레조차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맡았다. 줄 때에는 확실하게 줘야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고 핑계를 댔다. 대학에 대해, 학문에 대해, 교육에 대해, 무엇보다 행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학습한 적이 전혀 없음에도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맡는 것보다는 내가 맡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근거 없이 합리화했다. 그리고 ‘구조조정’이라는, 이제 생각해보면 대학에는 가당하지 않은 이름을 앞세운 ‘대학 황폐화 작업’에, 내가 근무하는 대학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며, 가담하고 앞장섰다. 보직을 맡지 않았을 때에는 적당한 수준에서 총장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전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근래 나는 대학에서 보직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모호한 일을 맡고 있는데, 엊그제도 ‘당신은 회의를 기준이나 원칙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했을 뿐 아니라,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냈으니 사과하고 책임지라’는 공박을 받았다. 내 능력과 품성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 욕심이 불러온 설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연줄에 기대어 정치판에도 기웃거렸다. 이름을 말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정치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나라를 걱정하는 ‘高談峻論’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불러주면 열심히 수발을 들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내 지식의 깊이가 얕았던지, 내 이름값이 저렴했던지, 아니면 내 태도가 미덥지 못했던지 나를 불러주는 정치인은 없었다.

텔레비전에도 한 번 출연한 적이 있다. ‘숫자 어쩌고’ 하는 책을 놓고 서너 명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는 내용 없는 잡담으로 시청자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나갔다. ‘혹시 아는가, 나도 대중매체에 적합한 체질이어서 계속 기회가 생길지.’ 분장 담당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고집했는데, 내가 몰라볼 만큼 늙은 내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낙담하고 말았다. 그런 외모 탓이었던지, 아니면 어눌하고 재미없는 말주변 탓이었던지 그 뒤에는 어디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신문사 같은 곳에서 원고를 부탁해오면 군말 없이 응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지역 신문에서 (아마도 거기 근무하는 제자의 주선으로) ‘고정칼럼’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자를 성추행한 뒤 ‘식당 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거듭 망발한 검사 출신의 지역 유력 정치인과, 교수들의 항의를 피해 병실에 입원해서 치명적인 결정을 한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총장을 싸잡아 ‘최소한의 품위라도 지키라’고 힐난하는 첫 번째 원고를 보낸 것으로 끝났다. 그 원고가 게재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나는 내 원고의 행방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악명이 퍼졌던지 그 뒤에는 원고를 부탁받는 일이 아예 없었다.

동료 교수가 이름을 얹어줘서 지방정부의 용역사업에 참여한 일도 있지만 그 또한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지역개발 사업 항목을 ‘제안’하라는 것이었는데, 중간보고를 한 뒤 용역비 지급이 중단되고 용역사업은 유야무야 끝났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알아본다며 그 돈으로 심지어 일본 구경까지 했던 마당에, 황당했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역을 맡긴 시장의 의도는 자신이 추진하려는 ‘폼 나는’ 토목건설 사업을 정당화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엉뚱한 다리를 긁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폴리페서를 비웃고 텔레페서를 조롱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여우의 신포도라고 해야 한다. 이리 재고 저리 간보며 이익을 구하면서도 ‘교수’라는 명함으로 속물스러움을 적당히 감추고 고상한 척했을 뿐이다. 단적으로, 나도 가끔은 ‘시국’과 관련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고, 서너 번은 후배 교수들에게 등 떠밀려 앞에 나서기도 했다. 친분 있는 국정원 직원이 더러 연락해온 것을 보면 어디선가 뒷조사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연구재단의 무슨 단장 자리인가를 제안 받았다가 ‘당신 꼬임으로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 없었던 일이 됐다’는 이야기를 동료 교수에게서 들은 적은 있지만, 딱히 내가 교수 노릇하는 데 불이익이 된다고 느낄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이 기울어졌을 때에나 나는 지식인으로서 공공성을 수호하는 척 나섰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교수가 된지 10년쯤 지난 후, 지금 젊은 교수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렵지 않게 ‘정년보장’을 받았다. 정년보장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 그러니까 이런 저런 압력에서 자유롭게 뜨겁게 연구하고 발표하라는 명령인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내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경력이 늘어난 만큼 무게도 잡고 싶었고 평판도 얻고 싶었다. IMF 관리의 경제위기를 거쳤어도 신자유주의의 혹독함은 아직 교수들에게 당도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면, 모났다거나 괴팍하다거나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고 뒷담화를 하면서도, 각박하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그런 기회들을 챙기고 만들면서 ‘교수’의 자세가 관성으로 몸에 익었고 당연히 연구와 교육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보냈다.

잔혹한 시대, 암울한 시대, 각박한 시대를 거치며 나는 운이 좋았던 덕택에 ‘직업’ 교수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렇게 대충대충 지내왔다. 교수를 두고 “실력이 없다. 품격이 낮다. 휴강이 많다. 가르치는 일에 성의가 부족하고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타박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지만,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교수 사회의 관행과 규범에 적당히 타협했고 적당히 안주했다. 누구에게도 뜨거운 적이 없으면서도, 나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믿으며,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찼다. 브레히트는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졌다”고 자멸(自蔑)했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무림에는 고수가 많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이 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그 와중에 위암을 발견하고 조직검사를 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울 뿐입니다. (2015)

놀라운 증례 PPT 11M


2018-4-26. KINGCA2018에서 질문을 받고 답변하였습니다. 반만 답변하고 반은 참았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외과 선생님 질문]

저희 기관에서는 수술 후 환자 내시경을 외과에서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조직검사를 해야 합니까?

[이준행 답변]

(1) Subtotal gastrectmoy 후 remnant stomach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일반적인 위내시경에 매우 익숙해진 후 remnant stomach에 대한 내시경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2) 수술 병리를 확인한 후 검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Undifferentiated histology이고 resection margin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는 anastomosis site recurrence를 더욱 주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Remnant stomach의 보만 4형 진행성 위암을 주의하십시요.

(4) 다른 부위와 마찬가지로 erosion, ulcer, localized tumor는 조직검사의 대상입니다.

(정치적인 이슈때문에 다음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꼭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외과 의사로서 일반적인 위내시경을 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postop 환자에 대한 내시경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만, 내과와 상의하여 외과 의사의 내시경 교육 프로그램을 다듬고 업무를 조절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외과 의사도 위내시경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검사할 생각이면 잘 배운 후 내시경을 잡아야 합니다. 충분히 배우지 않고 내시경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독립적인 내시경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달 정도의 full time endoscopy training이 필요합니다. 저는 내시경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르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겠다는데 진료과 기득권을 논하면서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배우고 싶으나 영상의학과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상의학과를 욕하는 내과 의사가 내시경을 배우고자 하는 외과 의사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못하게 할 권한이 없으면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지 않는다고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엉터리로 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르쳐야 합니다. 환자를 위하여. ")



© 일원내시경교실 바른내시경연구소 이준행. EndoTODAY Endoscopy Learning Center. Lee Jun Haeng.